-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1991년 부산고등학교 야구부에는 훗날 KBO 리그에서 MVP 1회, 골든글러브 2회, 평균자책점왕 2회, 다승왕 3회 등을 합작한 무서운 투수 3인방이 있었다. 바로 3학년 염종석, 2학년 손민한, 1학년 주형광이었다. 세 선수가 재학 중이던 1989년부터 1993년까지 5년 동안 부산고는 전국대회에서 3회 우승, 1회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그중에서도 고교 시절 활약이 가장 뛰어났던 선수는 단연 주형광이었다. 경남고의 손인호와 함께 부산지역 좌완 투톱이던 주형광은 이미 2학년 시절부터 선배 손민한의 부상 공백을 메우며 에이스로 올라섰다. 제26회 대통령배 야구대회에서는 결승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등 5연속 완투승을 거두며 우승기를 모교로 가져왔다. 이어 고3 시절에도 봉황대기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초고교급 투수’로 떠올랐다.
이런 거물급 투수를 두고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주형광의 연고팀인 롯데 자이언츠는 팀 컬러에 맞지 않는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했고, 동국대학교는 주형광의 동기 5명을 함께 데려가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결국 주형광의 선택은 롯데였다. 프로행을 택한 주형광에게 롯데는 당시 고졸 신인 최고 금액인 1억 400만 원(계약금 9,200만 원+연봉 1,200만 원)을 안겨주며 뜨겁게 환영했다.
만 18세의 앳된 신인 주형광은 프로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베테랑 선배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주형광은 시범경기 9이닝 동안 탈삼진 9개를 기록하는 동안 한 점도 내주지 않으면서 프로 적응을 마쳤다는 신호를 보냈다. 오죽하면 양상문 당시 투수코치가 “장래를 위해 올해는 10승을 거두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좋은 페이스를 보여줬다.
당시 롯데는 염종석, 박동희, 윤형배, 김상현 등 10승 이상이 가능한 투수들이 대거 방위병 복무 중인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고려대 시절 내야수로 더 잘 알려진 대졸 신인 강상수가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설 정도였다. 이런 팀 사정 속에 주형광은 1군 엔트리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됐다. 데뷔전(4월 13일 OB전)부터 선발투수로 나선 주형광은 프로의 쓴맛을 느꼈다. 주형광은 OB 타선을 상대로 3이닝 5실점으로 무너지는 굴욕을 겪었다. 훗날 주형광은 “경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1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로는 ‘내가 프로에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실망을 했다”라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음을 고백했다.
절치부심한 주형광은 이틀 뒤 드디어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낸다. 4월 15일, 사직 LG전에서 주형광은 1점 차로 앞선 9회 초 무사 2, 3루 위기에 등판했다. 첫 타자 류지현에게 좋은 공을 주지 않으면서 만루를 만든 주형광은 자신과 계약금 액수를 두고 경쟁하던 김재현을 만났다. 주형광은 김재현에게 1루 땅볼을 유도해 병살타를 만들어냈다. 분위기를 끌어올린 주형광은 다음 타자 김태민도 2루 땅볼로 잡아내며 데뷔전에서 역대 최연소 세이브(18세 1개월 14일)를 기록했다.
주형광의 최연소 기록 달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일 뒤인 4월 19일, 시즌 두 번째 선발 등판에 나선 주형광은 한화 이글스의 에이스 정민철과 맞대결을 펼쳤다. 2회 1실점을 하기는 했지만 한화 타선을 단 2안타로 잘 틀어막은 주형광은 선배들이 만든 한 점의 리드를 끝까지 지켜내며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주형광은 하루에 최연소 기록을 두 개나 만드는 쾌거를 이뤄냈다. (18세 1개월 18일)
이후로도 훌륭한 투구를 이어가던 주형광은 여름이 가까워지던 6월 초, 또 하나의 최연소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주형광은 6월 9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1회 첫 두 타자를 범타로 처리한 주형광은 노장 김성래에게 좌전안타를 허용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은 주형광은 다음 타자 양준혁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마감했다.
이후 삼성 타자들은 주형광에게 안타 하나 뽑아내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구속은 140km/h 전후로 보통 수준이었지만 몸쪽으로 살벌하게 들어오는 주형광의 속구에 삼성 타자들은 좀처럼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7회 김성래와 강기웅에게 볼넷을 내준 것을 제외하면 주형광은 한 이닝에 두 명의 주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형들도 어린 동생을 도왔다. 3회 초 1, 3루 찬스에서 김민호의 2루 땅볼로 선취점을 올린 롯데는 5회 김민호와 공필성, 조성옥의 3연속 적시타가 터지면서 한꺼번에 3점을 득점했다. 6회와 7회에도 추가점을 내면서 롯데는 주형광에게 6점의 리드를 안겨줬다.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온 주형광은 이만수에게 안타를 맞기는 했으나 더 이상의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대구 시민야구장 전광판에 찍힌 삼성의 득점은 ‘0’. 주형광은 9이닝 동안 131구를 던지며 2안타 3볼넷만을 내주는 동안 삼진을 7개나 잡아내는 호투를 펼쳤다. 이로써 주형광은 2021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연소 완봉승(18세 3개월 7일) 기록을 만들었다.
주형광의 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스팔트에서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열대야가 35일씩이나 지속되던 역대 최악의 여름 더위 속에서도 주형광은 꾸준히 마운드에 오르며 선배들의 공백을 메워줬다. 결국 주형광은 시즌 28경기에 등판, 186.2이닝 동안 11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 3.04를 기록하며 신인왕 투표에서 5위에 올랐다. 하필 류지현-김재현-서용빈의 LG 신인 트리오가 활약하는 바람에 많은 표를 받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후 주형광은 이듬해 처음으로 200이닝을 넘기더니 1996년에는 18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 3.36을 기록하며 다승왕과 탈삼진왕(221탈삼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활약했지만 어린 나이부터 너무 많은 이닝을 던진 탓에 2000년 이후로는 재활에만 매달렸다. 결국 주형광은 2007시즌이 끝나고 32세의 나이에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1년 선배 손민한이 전국구 에이스로 활약 중이었고, 먼저 혹사에 시달렸던 2년 선배 염종석마저도 여전히 현역 생활을 이어가던 시점이었다. 100승은 거뜬히 거둘 것 같았던 주형광의 다승 카운트는 ‘87’에서 14년째 멈춰 있다.
사진=롯데 자이언츠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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