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요계에는 브레이브걸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롤린으로 데뷔 5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정확히는 1,854일로 역대 최장 기록이다. 오랜 기간 무명으로 지낸 만큼 대중은 이들의 역주행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걸그룹 계에는 3년 안에 공중파 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지 못하면 그 팀은 앞으로도 1위를 할 수 없다는 속설이 있다. 이는 흔히 3년의 법칙으로 통한다. 수많은 걸그룹 중 이 법칙을 깬 팀은 브레이브걸스, 오마이걸, 쥬얼리 단 세 팀에 불과하다.
3년의 법칙은 단순한 징크스가 아닌 이유 있는 이야기다. 대부분의 걸그룹은 데뷔 후 3년이 넘으면, 이미지 소모로 새로운 팬을 모으기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매년 쏟아지는 새로운 그룹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이때문에 3년이 넘어가면 소속사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그룹을 해체하는 경우가 많다. 매몰될 투자 비용은 둘째 치고 그룹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프로야구판도 비슷하다. 팀은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준다. 처음에는 조금 못 치더라도 흔히 경험으로 치부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그 상태로 한 시즌, 두 시즌 타석이 쌓이다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팀에는 새로운 유망주가 생기고, 가능성을 보지 못한 선수에게 더는 투자할 여력도 없다. 이렇게 팀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면, 선수는 트레이드되거나 끝내는 방출된다.
그렇다면 걸그룹의 3년처럼, 야구선수에게도 기회의 ‘마지노선’이 있을까.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선수의 기량 추이를 살펴보기 위한 참고 기록은 OPS+, 350타석 롤링 에버리지로 했다. 롤링 에버리지는 특정 표본 수를 기준으로 매 시점의 평균을 구하는 방식이다. 이동 평균으로도 번역된다.
*OPS+ 계산 과정에서 파크팩터는 고려하지 않았다. 계산에 들어가는 출루율과 장타율은 리그 종료 시점의 평균값을 활용했다. 여러 시즌이 겹치는 경우 시즌별 타석 수에 가중치를 둬 계산했다. 350타석을 기준으로 활용한 이유는 KBO리그에서 OPS가 안정을 찾는 샘플 사이즈가 350타석 정도이기 때문이다.
참고 대상은 2005년부터 2020년까지 데뷔한 선수 중 1,200타석 이상을 소화한 동명이인 제외 79명이다.
모두 다른 성장 추이
당연하지만 선수마다 성적 변화 추이가 각기 다르다. 다만 대부분의 선수는 타석이 누적됨에 따라 성적 향상이 일어났다. 첫 350타석부터 1,000타석까지는 100 미만의 OPS+를 기록하다가 이후에 점차 우상향하는 성장세가 가장 흔했다. 대표적으로는 박병호가 1,000타석 직전에 OPS+가 100까지 수직 상승하더니 이후 3,000타석 동안에는 150이 훌쩍 넘는 OPS+를 기록했다.
붉은 선은 리그 평균(100), 파란 선은 선수 평균
김현수, 구자욱, 강백호, 이정후 같은 소위 ‘천재’만이 처음부터 100을 한참 상회하는 OPS+를 기록했다. 이 밖에 단타 위주의 타자인 이종욱, 고종욱, 박해민 등은 처음부터 100 전후의 OPS+를 기록했지만, 장타력의 한계로 갑작스러운 성적 향상은 없었다.
재밌는 것은 짧은 구간에서라도 OPS+ 150 이상을 기록해 본 선수는 모두 1,000타석 이내에 OPS+ 100을 넘겨본 선수였다. 바꿔 말하면, 1,000타석 이내에 OPS+ 100 이상을 기록하지 못한 선수는 앞으로는 OPS+ 150 이상을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이야기다. OPS+ 150을 잠재력 폭발의 기준으로 잡으면, 야구계에도 3년의 법칙과 비슷한 징크스가 존재하는 셈이다.
각각 OPS+ 100/150 달성 순간 타석 수 TOP5, 괄호 안은 달성 나이
*350이라면, 1~350타석까지의 OPS+를 말한다.
왼쪽의 표를 보면 흔히 알려졌던 유한준, 민병헌같이 늦게 재능을 꽃피운 선수도 모두 1,000타석 이내에 OPS+ 100 이상을 기록해본 경험이 있었다. 안치홍 역시 900타석을 넘긴 시점에 OPS+ 100에 턱걸이했다.
눈을 돌려 오른쪽 표의 OPS+ 150 이상 달성까지 걸린 타석 수도 살펴보자. 가장 오래 걸린 선수는 황재균이었다. 황재균은 4,500타석을 넘겨 처음으로 OPS+ 150을 넘겼다. 황재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지난 시즌에 다시 OPS+ 150 이상의 구간을 기록하면서 숨겨진 대기만성형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계단식 성장도 가능
황재균의 사례를 살펴봤지만, 꼭 150 이상의 OPS+가 아니더라도 타석이 한참 누적된 뒤에야 타격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는 선수가 존재한다.
가령 허경민은 커리어 내내 100 미만의 OPS+를 기록하다가 2,500타석 이후에는 100 이상의 OPS+를 기록하고 있다. 박동원은 1,500타석까지 OPS+가 100 미만이었는데, 2,000타석을 넘어서면서 한동안 150에 육박하는 OPS+를 기록했다.
이런 선수들의 공통점은 대체로 포지션이 유격수, 중견수, 포수다. 해당 포지션은 타격 재능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공수 재능을 두루 갖춘 유망주가 부족한 KBO리그의 특성상 수비력만이라도 갖추면 많은 타석을 부여받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갖진 못했더라도, 지속적인 경험 누적이 타격 성장에 꽤 중요한 부분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시점에 신체 전성기가 겹치면 수천 타석을 소화한 상황에서도 갑작스럽게 계단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망주 중 해당 요건에 걸려있는 선수
앞서 사례를 봤으니 이번엔 현재 리그의 유망주의 추이가 궁금해질 차례다. 리그를 대표하는 유망주인 한동희와 최원준 먼저 살펴보자. 이 둘은 지난 시즌을 기점으로 1,000타석을 넘게 소화했다.
한동희는 1,000타석 직전에 OPS+ 100 이상을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대선수가 될 첫 관문은 잘 지난 셈이다. 반면 최원준은 1,000타석이 조금 넘어 OPS+ 100을 넘겼다.
정은원도 갓 1,000타석을 넘겼다. 데뷔 초 인상적인 모습으로 비교적 빠르게 OPS+ 100 이상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낙폭이 워낙 컸다. 장타력이 빼어난 유형이 아니기 때문에 수비력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기회를 받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김하성의 자리를 이어받은 김혜성도 1,000타석 직전에 OPS+ 100을 넘기는 데 성공했다. 정은원과 마찬가지로 장타력에서 약점이 있지만, 수비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만큼 꾸준히 기회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나이는 다소 많지만 김동엽도 비슷한 구간을 지났다. 데뷔 초 폭발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하락세를 보였던 김동엽은 지난 시즌 막판 다시 살아나면서 ‘폭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를 통해 단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위의 내용은 존재했던 사례를 살펴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전엔 없었지만 새로운 사례는 언제든 등장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글은 타석 수만 고려한 극히 단편적인 글이다. 2군 혹은 다른 리그에서 부여받은 기회는 포함하지 않았다. 또한 기회를 받는 시점에서 선수의 나이도 고려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OPS+를 활용한 글이기 때문에 해석 시에 김상수, 박민우 등 높은 출루율 위주의 선수들이 저평가된 경향도 있다. OPS+를 기준으로 선수의 성장 추이를 보며 성장 징크스 하나를 ‘억지로’ 만들었을 뿐이다.
브레이브걸스는 처음으로 5년을 넘겨 1위를 차지한 그룹이다. 어두운 기간 동안 간절함으로 숱한 노력을 쌓아 결국에는 자신들의 꿈을 이뤘다. 이런 간절함은 야구계에도 똑같이 통용된다. 언젠가는 야구계에도 1,000타석을 넘겨서 대폭발하는 선수 하나쯤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그날을 기대해 본다.
야구공작소 이현승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신하나, 전언수
사진: 두산 베어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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