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두 번째 스무살] 1982년 – 프로 창단 첫 경기

  • 이 연재물은 ‘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와 함께 합니다.

  • 2021시즌은 롯데 자이언츠가 프로 창단 후 맞이하는 40번째 시즌입니다. 사람 나이로는 ‘불혹’에 해당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비록 찬란한 왕조를 세우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한 시즌 한 시즌을 보냈던 롯데의 40년을 돌아보며 창단 40주년인 2022년 2월 12일까지 매 시즌 기억에 남을 인상적인 한 경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982년부터 시간 순서대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시작은 1982년 2월 12일이다. 같이 출범한 6개 팀 중 가장 늦은 날짜였다. 그러나 롯데에 ‘풋내기’ 혹은 ‘설익은’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프로 전환만 늦었을 뿐 롯데는 원년 팀 중 유일하게 실업야구 팀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여기에 일본에서도 프로야구 팀(롯데 오리온즈, 현 치바 롯데 마린스)을 소유하고 있어 누구보다도 프로라는 개념을 잘 알고 있는 팀이었다.

입단할 수 있는 선수의 구성도 타 팀에 뒤지지 않았다. 1980년 도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3루수 부문 베스트에 선정되며 ‘아시아의 3루수’로 등극한 김용희, 실업야구 시절 국가대표 단골 멤버였던 김정수, 실업야구 강팀 한일은행의 중심타자였던 김용철 등이 타선에 포진했다. 타선의 짜임새만큼은 어느 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구성이었다.

다만 투수진에 있어서는 의문부호가 붙었다. 특히 부산을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무쇠팔’ 최동원이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면서 롯데는 에이스 없이 시즌을 시작하게 됐다. 고려대의 에이스였던 언더핸드 노상수와 그의 부산상고-고려대 동기였던 이윤섭, 철도고 시절 한 경기 22개의 탈삼진을 기록한 이진우와 경희대 시절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천창호 등이 주목할 만한 이름이었다.

롯데는 2월 초 18명의 선수와 계약에 합의했고, 이후 2월 중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선수 4명을 보강하며 선수단 구성을 완료했다. 다음은 원년 개막전 당시 롯데의 선수진이다.

△감독 = 박영길
△코치 = 김명성(투수) 최주억(타격)
△투수 = 최옥규 김덕열 김문희 천창호 이윤섭 노상수
△포수 = 차동열 최순하
△내야수 = 김정수 김일환 이성득 김용희 정학수 김용철
△외야수 = 김성관(주장) 박용성 엄태섭

선수 구성을 마친 롯데는 1982년 3월 28일, 홈구장인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대망의 프로 첫 경기를 하게 됐다. 상대는 제과 라이벌이자 영·호남 라이벌인 해태 타이거즈였다. 롯데는 먼저 프로화를 결정한 뒤 해태그룹이 참여하자 ‘동일 업종 그룹은 피한다’는 합의를 어겼다며 리그에 불참하겠다는 뜻을 밝힐 만큼 해태를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또한 실업 롯데의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 해태 감독도 롯데를 계속 자극했다.

이런 분위기가 흥행에 도움이 됐을까, 개막전이 열린 구덕구장에는 11,428명의 관중이 입장해 역사적인 경기를 지켜봤다. 롯데는 이날 언더핸드 노상수가 선발투수로 나섰고, 정학수(2루수)-엄태섭(중견수)-김정수(우익수)-김용희(3루수)-김용철(1루수)-김일환(1루수)-김성관(좌익수)-차동열(포수)-권두조(유격수)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해태 역시 김성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등 이름만 들어도 강력한 타선으로 롯데를 상대했다.

이렇듯 치열하게 시작한 개막전은 의외로 1회부터 한쪽으로 분위기가 쏠렸다. 롯데 선발 노상수가 1회 초를 무실점으로 막은 후 1회 말부터 롯데의 공격이 폭발한 것이다. 이날 해태 선발투수였던 방수원은 당시 영남대 4학년을 중퇴하고 프로행을 택하면서 프로-아마 간 갈등의 중심으로 지면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 때문일까? 방수원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롯데 창단 첫 타점의 주인공인 김용희(사진=KBO)

선두타자 정학수가 볼넷으로 걸어 나간 뒤 2번 엄태섭의 타구에 해태 유격수 조충열이 실책을 저질렀고, 3번 김정수도 볼넷을 얻어내며 롯데는 무사 만루 찬스를 잡았다. 여기서 4번 타자 김용희가 유격수 옆을 빠져나가는 2타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먼저 2점을 얻어냈다. 이어 김용철의 적시타까지 터지며 결국 방수원은 5타자 만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롯데는 뒤이어 올라온 신태중에게도 김성관과 권두조가 적시타를 때려냈고, 다시 타석이 돌아온 정학수가 2루타를 터트리면서 1회에만 7득점을 올렸다.

롯데는 2회 한 점을 추가한 뒤 6회 말에도 볼넷 5개를 얻어내며 6득점, 신태중마저도 마운드에서 끌어내렸다. 그 사이 롯데 선발 노상수는 6회 1점을 내주기는 했으나 해태 타선을 6이닝 동안 3피안타 2볼넷으로 요리하면서 호투를 펼쳤다. 해태는 홈 개막전을 대비하기 위해 3루수였던 김성한을 6회 마운드에 올려 남은 이닝을 처리했다. 결국 롯데는 첫 경기부터 기대했던 타선의 활약 속에 14대 2로 대승을 거두며 프로에서의 기분 좋은 첫 출발을 보였다.

이날 경기에서는 의미 있는 기록도 나왔다. 노상수에 이어 7회 등판한 우완 최옥규는 9회 김일환의 실책으로 인해 1점을 내줬을 뿐 3이닝을 잘 막아내면서 KBO 리그 1호 세이브를 달성했다. 2017년이 되어서야 세이브왕(손승락)을 배출했던 롯데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초 세이브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롯데 박영길 감독은 “프로의 싸움은 경기장 안에서 하는 것이지 밖에서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해태 김동엽 감독을 저격하는 듯한 멘트를 남겼다. 이어 박영길 감독은 “그동안 단단히 별러왔기 때문에 오늘의 승리가 통쾌하지만 너무 실력 차가 두드러져 섭섭하기까지 하다”라며 ‘스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롯데가 해태에 웃을 수 있었던 순간은 여기까지였다. 롯데는 2001년 7월 해태가 사라질 때까지 통산 147승 198패 10무를 기록하며 해태왕조의 자양분이 돼주었다. 특히 1997년에는 페넌트레이스에서 3승 15패로 처참하게 무너지며 해태의 마지막 우승에 1등 공신으로 남았다.

1982년 3월 28일 롯데-해태전 박스스코어(사진=KBO 박스스코어 프로젝트)

 

야구공작소 양철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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