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P보다 낮은 ERA, 순전히 운일까?

FIP는 더 이상 야구 팬들에게 낯선 용어가 아니다. FIP는 Fielding Independent Pitching의 약자로써, ‘수비무관 평균자책점’을 가리킨다.

운과 팀 수비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 ERA에 비해 FIP는 투수 고유의 능력을 더욱 정확하게 측정하고, 투수가 미래에 낼 성적을 예측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FIP를 구하는 공식은 다음과 같다.

FIP = {(-2)×삼진+3×(볼넷+몸에 맞는 볼-고의사구)+(13×홈런)}/이닝+C(상수)

(C는 매해 리그의 득점 환경에 따라 조정되며, 리그 평균 ERA와 FIP를 같은 값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FIP 공식을 쉽게 설명하면 ‘투수의 역할은 삼진을 많이 잡고, 사사구와 홈런을 내주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는 운의 영역으로써, 투수 고유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FIP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거나 낮은 ERA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FIP에 수렴한다. 운이 영원히 좋거나 나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몇몇 투수들은 여러 해에 걸쳐 꾸준하게 양수의 FIP-ERA 값을 기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갭이 생기는 데에는 홈구장의 파크팩터와 팀 수비 탓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투수 본인의 능력도 관여한다. 과연 홈런, 사사구를 안 내주고 삼진을 잡는 것 외에 어떤 방법으로 실점을 억제할 수 있을까?


1. 땅볼을 유도하라

FIP 공식은 인플레이 타구의 결과를 배제한다. 하지만 모든 인플레이 타구가 같은 질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땅볼을 유도하는 것이 투수에게 좋다는 것은 야구계의 오랜 상식이다. 땅볼은 장타가 될 가능성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MLB에서 모든 땅볼 타구의 평균 장타율은 0.258에 불과했다(뜬공은 0.758). 또한 땅볼 투수는 위기 상황에서 병살타를 유도해 잔루율을 높일 수 있다. 잔루율은 ‘투수가 출루시킨 주자 중 득점하지 않은 비율’을 나타내는 지표인데, 2004~2014년 MLB에서 잔루율과 FIP-ERA의 상관계수는 0.737에 달했다.

*잔루율(LOB%) = (H+BB+HBP-R)/{(H+BB+HBP-(1.4×HR)}

통산 GB%(인플레이 타구 중 땅볼 비율)가 66.6%에 달하는 ‘땅볼 유도의 달인’ Zack Britton. 그의 통산 ERA는 3.04, FIP는 3.45이다.


2. BABIP를 통제하라

FIP에 대한 글에서 BABIP(인플레이 타구 타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투수의 BABIP에서 실력과 운이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몇 퍼센트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몇몇 투수들은 확실히 남들보다 낮은 BABIP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고, 그렇다면 FIP보다 ERA가 낮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현역 메이저리거 중 BABIP가 눈에 띄게 낮고, 오랜 커리어 동안 이것이 플루크가 아님을 증명한 투수는 Tyler Clippard(0.239), Darren O’Day(0.255), Craig Kimbrel(0.263), Julio Teheran(0.268) 등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들 모두가 플라이볼 투수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얼핏 필자가 1번에서 제시한 내용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투수 입장에서 뜬공보다는 땅볼을 유도해야 좋은 것 아니던가?

위에서 언급한 네 투수의 공통점은 IFFB%(인플레이 타구 중 내야플라이 비율)가 높다는 것이다. 뜬공은 일반적으로 땅볼보다 안 좋다. 하지만 어떤 투수들은 빗맞은 뜬공, 다시 말해 팝업 타구를 유도하는 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나고, 이는 땅볼에 비해 결코 나쁘지 않다. 내야플라이는 안타가 될 가능성이 0에 가깝기 때문이다(팬그래프에서는 투수 WAR을 계산할 때 내야플라이를 삼진과 같이 취급한다). 파울플라이 역시 내야플라이와 비슷한 이유로 ERA를 낮춰준다.

요약하면, BABIP가 낮은 투수와 땅볼 유도형 투수 모두 인플레이 타구의 질을 통제해서 실점을 방지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전자에 해당하는 투수들은 팝업 타구를 유도해 안타 자체를 잘 내주지 않는다면, 후자는 약한 땅볼을 유도해 장타를 최대한 억제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명전급 중간계투‘ Tyler Clippard. 15.8%의 높은 IFFB% 덕분에 그의 통산 BABIP는 0.239에 불과하다. 그의 통산 ERA는 3.13, FIP는 3.84이다.


3. 주자를 묶어라

좌완 투수의 평균 FIP-ERA 값은 우완 투수의 그것보다 미세하게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왜일까?

그것은 1루 주자를 묶는 데 있어서 좌완이 우완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좌완 투수는 1루를 마주보고 던지기 때문에, 주자는 견제를 의식해서 리드 폭을 줄이고 도루 시도도 더 적게 하게 된다. 던지는 방향뿐 아니라 투수의 견제 동작, 슬라이드 스텝의 속도에 따라서도 주자를 묶는 능력은 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0.1~0.2초의 차이가 이후 인플레이 상황에서 홈까지 들어올 주자를 3루에서, 3루까지 진루할 주자를 2루에서 멈추게 만든다. 견제로 직접 아웃카운트를 올려 위기를 탈출하는 데 능한 투수들도 있다.

또한 폭투와 보크 등은 주자에게 공짜로 진루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실점 확률을 높인다. 이러한 공짜 베이스를 내주지 않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주자를 묶는 능력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류현진의 MLB 통산 도루허용은 7개밖에 되지 않는다. 도루저지는 6개. 그의 통산 ERA는 2.95, FIP는 3.30이다.


4. 수비를 잘하라

FIP 공식에서 인플레이 타구를 배제하는 것은 투수가 타구의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투수는 투구만 하는 직업이 아니다. 투수는 자기 쪽으로 날아온 타구를 처리하고, 1루 베이스 커버와 백업 플레이도 해야 하는 ‘제5의 내야수’이다. Ken Woolums의 ‘A Look Into the Mist: Pitcher Defense‘라는 글에 따르면, 투수 Jake Westbrook은 2012시즌에 자신의 수비만으로 9이닝당 0.48점의 실점을 방지한 반면, Philip Humber는 9이닝당 0.34점을 더 헌납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투수가 수비를 못해서 점수를 내줬다 할지라도 ERA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책점 계산에서 투수는 일반 야수와 똑같이 취급되므로, 투수 본인의 실책으로 인한 실점이 비자책으로 기록되는 것이 그 원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ERA가 아니라 비자책 실점까지 포함하는 RA9(9이닝당 허용 실점)을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골드글러브 5회 수상에 빛나는 Kenny Rogers는 MLB 역사상 가장 수비를 잘했던 투수 중 하나이다. 그의 통산 ERA는 4.27, FIP는 4.38이다.


5. 위기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라

세이버메트리션으로서 필자는 기본적으로 ‘클러치’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어떤 타자의 상황별 성적이 크게 달라진다면, 그것은 클러치 히팅의 결과라기보다는 작은 표본 크기의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다음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잠깐 타석에 나왔다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타자와 달리, 투수는 한 경기에서 짧게는 두세 타자, 길게는 스무 타자 이상을 연속으로 상대해야 한다. 모든 타석, 모든 카운트에서 전력투구를 했다가는 어깨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투수는 완급조절을 한다. 주자가 득점권에 있을 때, 중심타자가 나왔을 때 더욱 강하게 공을 뿌린다는 뜻이다.

데드볼 시대의 위대한 스크류볼 투수 Christy Mathewson은 자서전 ‘Pitching in a pinch’에서 이렇게 말했다. “It(screwball) is a very hard ball to deliver. Pitching it 10 or 12 times a game kills my arm, so I save it for the pinches.(스크류볼은 구사하는 데 힘이 많이 드는 구종이다. 경기마다 10~12구씩 던지는 것은 내 팔에 치명적이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상황을 위해 스크류볼을 아낀다.)”

*pinch는 당시 야구계에서 clutch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야구장에서 가장 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곳이 마운드인 만큼, 심리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2000년 NLDS 1차전에서 Rick Ankiel은 한 이닝 동안 무려 5개의 폭투를 범했다.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그의 투수 인생은 이후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이처럼 투수들이 입스(yips. 중압감과 긴장감 등으로 인해 갑자기 컨트롤 능력을 상실하는 것을 일컫는 스포츠 용어)를 겪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MLB 구단이 전문 스포츠심리학자를 고용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요약하자면 투수는 일정한 궤적과 속도로 공을 던지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순수한 스터프만으로 성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투수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기대되는 것(FIP)보다 더 나은 실적(ERA)을 거두기 위해서는 중요한 상황에 더욱 좋은 공을 던지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집중력에는 체력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이 모두 포함된다.

MLB 명예의 전당 최초의 만장일치 입회자 Mariano Rivera는 중요한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을 잘 구분하는 투수였다. 그는 포스트시즌에만 사용하는 ‘스위퍼’라는 구종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

그렇다면 위의 조건을 모두 갖춘다면 ERA를 FIP에 비해 얼마나 낮출 수 있을까? 그것을 정확히 계산해 낼 방법은 없지만, 다섯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투수의 예시를 통해 대략적인 추정은 해볼 수 있다.

통산 305승에 빛나는 좌완 투수 Tom Glavine이 좋은 예다. 그는 주무기인 체인지업을 이용해 무수히 많은 땅볼을 유도해 냈고(1), 0.280의 BABIP에서 보듯 강한 타구를 잘 허용하지 않았다(2). 또한 통산 도루저지율이 43%에 달했으며(3), 팀 동료 Greg Maddux에 가렸지만 매우 뛰어난 수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4). 거기에 큰 경기일수록 강해지는 마운드 위의 승부사로도 유명했다(5). 그렇다면 Glavine의 통산 ERA와 FIP는 각각 몇이었을까? ERA는 3.54, FIP는 3.95였다. ‘왕조’로 불렸던 90년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수비진 도움을 받았음에도 9이닝당 0.41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신이 투수라면 이 글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에 대해 신경 쓰기보다는, 삼진을 많이 잡고 볼넷을 피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야구공작소 나상인 칼럼니스트

참조 = Fangraphs, Baseball Reference, Beyond the Box 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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