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죽음, 그리고 잭 갤런의 3실점 이하 경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우완 선발 투수 잭 갤런은 아직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성적은 에이스의 반열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95년 8월생인 갤런은 지난해 6월 21일(한국시간) 마이애미 말린스 소속으로 데뷔전을 치른 이후 현재까지 22경기 연속 3실점 이하만을 허용하며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웠다. 애리조나 팬들에게 갤런의 호투는 세금과 죽음만큼이나 당연한 것이 되었다.
갤런이 22경기 동안 기록한 주요 성적은 다음과 같다.
FIP가 ERA에 비해 다소 높은 것이 우려스럽지만, 실점 억제 측면에서 갤런은 지난 1년간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데뷔한 2019년 6월 21일 이후 메이저리그 RA9(9이닝당 실점) 순위표에서 갤런은 4위에 위치해 있다(규정이닝 이상). 누적지표인 RE24(기대 득점 변화량)로 보더라도 갤런이 기록한 30.3의 수치는 메이저리그 전체 8위이다.
특히 갤런은 올해 사이영 컨텐더급 시즌을 보내고 있는 중인데, 지금까지 7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43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10실점만을 허용했다. 실점 기반으로 계산되는 bWAR은 맥스 프리드, 쉐인 비버, 다르빗슈 유, 랜스 린에 이은 메이저리그 전체 5위(2.0)이고, 시퀀싱*을 배제하는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의 투구 지표 DRA 기준으로는 메이저리그 10위(3.16)에 올라 있다.
* ‘안타-안타-홈런-삼진-삼진-삼진’의 순서대로 이닝이 진행된다면 투수는 3실점을 하게 되지만, ‘홈런-안타-안타-삼진-삼진-삼진’으로 진행된다면 1실점에 그친다. 이렇듯 타석의 배치 순서로 인한 실점 손익을 일컬어 시퀀싱이라 한다.
갤런의 활약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기에 더욱 놀랍다. 2016년 드래프트 3라운더(전체 106순위) 출신인 갤런은 빠르지 않은 구속 때문에 실링이 낮은 유망주로 평가받았다. 갤런의 스카우팅 리포트들은 하나같이 빅리그 4~5선발 혹은 스윙맨 보직이 그의 한계일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2020년 현재 갤런은 포심 평균 구속을 93.2마일까지 끌어올리고, 잭 그레인키와 로비 레이가 떠난 애리조나 로테이션의 에이스로 우뚝 섰다. 그것도 만 25세라는 어린 나이에 말이다. 이제부터 그의 성공 비결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1. 메이저리그 상위 1%의 커맨드
다양한 구종을 커맨드하는 능력은 선발 투수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다. 갤런의 통산 9이닝당 볼넷 3.6개는 커맨드가 뛰어난 투수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세부 지표를 살펴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2019시즌 갤런의 BB%(고의사구 제외)는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약간 높은 10.5%였다. 그러나 삼진 비율, 스트라이크 비율 등을 바탕으로 ‘기대 볼넷 비율’을 계산하는 알렉스 챔벌레인의 xBB%에 따르면 갤런은 실제보다 3%p 정도 적은 볼넷을 내줬어야 했다(7.2%). 그리고 올해 갤런은 작년보다 개선된 7.6%의 BB%를 기록 중이다.
베이스볼 서번트에서 제공하는 Edge%는 스트라이크존의 가장자리에 들어간 공의 비율을 가리킨다. 2020시즌 갤런의 Edge%는 48.5%로, 메이저리그 평균(39%)을 여유 있게 웃돈다. 반면 스트라이크존을 9등분했을 때 존 한가운데에 들어간 공의 비율을 뜻하는 Meatball%는 4.7%로, 메이저리그 평균(7.2%)보다 낮다.
Stats Perform에서 개발한 Command+는 구종별로 투수가 의도한 로케이션과 실제 로케이션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바탕으로 커맨드 능력을 측정한다(리그 평균 100). 2019년 커맨드+ 110을 기록했던 갤런은 올해 이 수치를 119.6까지 끌어올리며 메이저리그 전체 3위에 올라 있다(8월 28일 기준). Command+ 10위권 이내에서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93마일 이상인 투수는 불펜 투수인 딜런 플로로, 그리고 갤런뿐이다.
2. 4개 구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
갤런의 투구 레퍼토리는 포심, 커터, 커브, 체인지업, 그리고 투심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투심의 구사 비율은 1% 내외이고, 주로 4개의 구종으로 타자들을 상대한다. 눈에 띄는 특징은 좌, 우타자 모두에게 4개 구종을 고르게 사용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갤런의 2020시즌 좌/우타자별 구종 구사 비율이다.
‘팔색조’라 불리는 투수들도 타자가 어느 쪽 타석에 서는지에 따라 자신의 레퍼토리 중 2~3개의 구종만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슬라이더는 같은손 타자에게 강하고, 체인지업은 반대손 타자에게 강한 것처럼 구종별로 상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갤런은 모든 타자를 상대로 자신이 가진 레퍼토리를 십분 활용한다. 그 때문일까. 갤런의 통산 좌타자/우타자 상대 피OPS는 각각 0.640, 0.647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투수의 구종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로 피치 엔트로피가 있다. 피치 엔트로피가 높을수록 타자 입장에서 구종을 예측하기가 힘들다. 갤런은 2020시즌 좌타자 상대로 1.33, 우타자 상대로 1.26의 피치 엔트로피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리그 최고의 피네스 피처들인 댈러스 카이클(좌/우타자 각각 1.19/1.32), 잭 데이비스(1.16/1.13), 카일 헨드릭스(1.32/1.15)보다 뛰어난 수치이다.
또한 갤런은 카운트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구종을 구사한다.
2019시즌 갤런의 카운트별 구종 구사 비율을 나타낸 위 그림을 보면, 3-0을 제외한 어느 카운트에서도 변화구를 던지는 것을 꺼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표본은 작지만 2020시즌에도 이 경향은 지속되고 있다. 갤런을 상대로 게스히팅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타자들은 카운트에 상관없이 그가 던지는 4개의 구종에 모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3. 포심과 피치 터널을 이루는 커브
갤런하면 떠오르는 구종은 역시 체인지업이다. 독특한 쓰리핑거 그립을 잡고 던지는 그의 체인지업은 빠른 구속과 함께(평균 85마일) 큰 낙차를 자랑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갤런의 체인지업을 리그의 영건 투수들 중 최고로 꼽을 정도이다.
그러나 체인지업 못지 않게 위력적인 갤런의 비기(祕器)는 다름 아닌 커브이다. 그의 커브 회전량(Spin Rate)은 메이저리그 상위 59% 수준밖에 되지 않으며, 무브먼트 역시 평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화구가 그렇듯, 커브는 포심과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때 더욱 강력해지는 구종이다. 포심과의 피치 터널 측면에서 보면 갤런의 커브는 평균 이하에서 플러스급 변화구로 탈바꿈한다.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의 PreMax는 타자가 스윙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Decision point에서 두 구종이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측정한다. 2019시즌 갤런의 포심/커브 조합의 PreMax는 1.41인치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인 블레이크 스넬의 수치(1.24인치)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커브의 수직과 수평 릴리스포인트 역시 포심의 그것과 거의 일치하여 육안으로 구별이 불가능한 정도이다.
즉, 갤런의 포심과 커브는 비슷한 릴리스포인트와 초기 궤적(피치 터널)을 가지고 있지만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격히 변화한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피치 미러링’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020시즌 갤런의 커브 히트맵을 보면, 피치 미러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철저히 존 아래쪽에 투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갤런의 커브는 데뷔 후 지금까지 누적 구종가치 4.8점, 100구당 구종가치 1.26점이라는 쏠쏠한 실적을 올렸다. 특히 올해는 커브로 13개의 삼진을 잡아내는 동안 5개의 안타만을 허용하며 그의 가장 뛰어난 세컨더리 피치로 자리매김했다.
4. 득점권에서의 뛰어난 집중력
갤런의 실점 억제 능력의 비밀은 잔루율에 있다. 그가 2020시즌에 기록하고 있는 95.7%의 잔루율은 규정이닝을 채운 메이저리그 투수 중 트레버 바우어와 쉐인 비버에 이어 3위에 해당한다. 2019시즌에도 갤런은 83.7%의 잔루율로 80이닝 이상을 투구한 투수 중 해당 부문 4위에 오른 바 있다. 잔루율은 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표이며 표본이 커지면 평균에 수렴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투수의 능력도 어느 정도 관여하는 것이 사실이다. 높은 잔루율을 유지하기 위해선 탈삼진 능력과 더불어 위기 상황에서의 집중력이 필수적이다.
애리조나 팬이라면 주자 유무에 따라 2명의 잭 갤런이 있다는 것을 안다. 주자가 없을 때 갤런은 빠른 템포로 공을 던지며 스트라이크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한다. 그러나 주자가 있을 때 갤런은 전혀 다른 투수로 변한다.
Stats Perform에 따르면 2020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견제구를 가장 많이 던진 투수는 갤런(98개)이다. 2위인 그리핀 캐닝(34개)과 3배 가까운 차이가 난다. 갤런은 애당초 많은 출루를 허용하는 투수가 아니기에(WHIP 1.02) 그의 견제 횟수는 더욱 놀랍게 느껴진다. 주자가 나갈 때마다 연거푸 베이스로 공을 던지면서도 갤런은 도루를 저지하는 데 있어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7번의 도루 시도 중 단 1번만을 잡아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주자가 나가 있을 때 심리적으로 흔들려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루키 투수의 이미지가 연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갤런은 주자가 있을 때, 실점 위기일 때 더욱 강해진다. 이것은 득점권에서의 갤런의 어프로치 변화와 관련이 있다.
2020시즌 득점권 상황에서 맞이한 32번의 타석에서 갤런은 총 111개의 공을 던졌다. 그중 존 한가운데에 들어간 공(Meatball)은 2개에 불과했다. 장타를 피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존의 가장자리를 공략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실제로 갤런은 올해 득점권에서 단 1개의 장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제구를 위해서 구속을 희생한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갤런의 포심 구속은 비득점권(93마일)보다 득점권(93.6마일)에서 더 빨라졌다. 갤런이 올해 득점권에서 피OPS 0.268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린 것은 위기 상황일수록 더욱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한 덕분이었다.
에이스의 자격
갤런이 앞으로도 2점대 중반의 ERA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그의 성적은 확실히 적잖은 운이 따른 결과다. 그러나 마운드가 완전히 무너진 애리조나에서 갤런이 에이스 역할을 해줘야 함은 분명하다. 그에겐 그럴 만한 잠재력이 있다.
갤런이 지명받은 2016년 드래프트 3라운드엔 유독 좋은 투수가 많았다. 존 듀플란티어(12순위), 애런 서발리(15순위), 헤수스 루자르도(17순위), 더스틴 메이(24순위) 등이 모두 2016년 드래프트 3라운더 출신이다. 갤런은 이들에 비해 지명 순위(29순위)도 낮고 유망주로서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가장 먼저 리그 정상급 투수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운 29일 경기가 끝난 후 갤런은 인터뷰에서 “나는 언제나 내가 최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 목표를 이뤄 나가고 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갤런을 에이스로 만든 것은 바로 그 자신감이었다. 그는 투수로서 크지 않은 체격(188cm, 89kg)과 평균 이하의 구속 때문에 항상 저평가받았지만, 대학/마이너리그/메이저리그의 단계를 거치며 번번이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왔다.
언더독의 성공 스토리를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야구공작소 나상인 칼럼니스트
참조=The Athletic, Baseball Reference, Baseball Savant, Baseball Prospectus, Fangraphs, MLB.com, Stats perform, Baseball America, Brooks Baseball, AZSnakePit, Alex Chamberlain Tableau
사진 출처=AZSnakePit, Baseball Savant, Arizona Diamondbacks Official Youtube, gfyc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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