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삭스 스캔들을 아시나요?

지난 8월 14일 메이저리그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2경기 연속 홈런 6개를 기록했고(역대 4번째), 뉴욕 양키스 게릿 콜은 개인 20연승(역대 공동 3위)을 질주했다. 사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다면, 원래 이날 메이저리그의 주인공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였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꿈의 구장 프로젝트’를 실행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꿈의 구장 프로젝트는 영화 ‘꿈의 구장’ 촬영지인 옥수수밭 야구장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경기를 치르는 이벤트다.

영화 ‘꿈의 구장’ 촬영지인 옥수수밭 야구장

영화의 줄거리는 한 농부가 계시에 이끌려 옥수수밭을 갈아엎고 야구장을 짓는데, 그곳에 전설 속 야구 선수들이 등장하는 내용이다. 그 선수들은 ‘블랙삭스 스캔들’로 야구계에서 추방됐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수들. 영화는 과거의 향수를 일으키고 세대 간의 추억을 이어줬다는 호평 속에 흥행에 성공했고, 영화 촬영지인 옥수수밭 야구장도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젊은 팬층의 유입 부족으로 흥행 위기설이 나오는 메이저리그는 2020년 주요 이벤트로 꿈의 구장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비록 코로나 사태로 올해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사무국은 내년에 다시 추진할 의지를 밝혔다. 그렇다면 꿈의 구장 프로젝트의 주요 모티브가 된 블랙삭스 스캔들은 무엇일까.


블랙삭스 스캔들은 어떤 사건?

블랙삭스 스캔들은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 일부 선수단이 돈을 받고 고의 패배를 한 승부조작 사건이다. 블랙삭스 스캔들이 발생한 1900년대 초반, 선수들의 권익은 지금만큼 보장돼 있지 않았다. 1970년대 FA 제도와 연봉 조정 제도가 생겨나기 전까지, 선수들은 *보류 조항에 묶여 자의로 이적할 수 없었고 연봉 협상의 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보류 조항: 선수 의사와 상관 없이 구단에게 재계약 결정권을 부여하는 제도. 보류 명단에 포함된 선수는 타구단과 협상 권리가 제한된다.

당시 화이트삭스 선수단 역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1919년 화이트삭스의 구단주였던 찰스 코미스키는 대졸자 에디 콜린스에겐 높은 연봉을 보장한 반면, 가방끈이 짧았던 조 잭슨의 연봉은 후려쳤다. 진실 여부는 가려지지 않았지만, ‘블랙삭스’라는 명칭이 코미스키가 유니폼 세탁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선수들이 더러운 유니폼을 입고 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부당한 처우에 눈이 먼 화이트삭스 1루수 칙 갠딜은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도박사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7명의 동료 선수들과 접촉해 3루수 벅 위버를 제외한 6명의 선수들을 끌어들였다. 승부조작에 가담한 선수들이 대활약한(?) 1919년 월드 시리즈는 결국 신시내티 레즈의 우승으로 종결됐다.

블랙삭스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발생 1년 후인 1920년 시즌 말경 시카고의 대배심이 조사에 착수하고 나서부터였다. 재판 과정에서 몇몇 선수들은 혐의를 인정했고, 몇몇 선수들은 증언에 의해 혐의가 밝혀졌다.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구단주들은 양대 리그의 사건사고를 관할하는 커미셔너 직을 신설했고, 초대 커미셔너로 시카고 연방 판사였던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를 임명했다. 랜디스는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된 선수 8명 전원을 야구계에서 영구 추방했다.


스캔들에 휘말린 역대 최고의 타자, 조 잭슨

영화 ‘꿈의 구장’ 속 조 잭슨

승부조작은 스포츠 정신을 훼손한, 명백한 범죄 행위다. 그러나 영화 꿈의 구장이 연출한 조 잭슨(스캔들에 휘말린 선수 8명 가운데 1명)의 이미지는 범죄자라기보단 야구를 사랑하는 순수한 야구선수의 모습에 더 가깝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조 잭슨의 승부조작 가담 여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잭슨의 재판 과정에 대해선 많은 설이 있는데, 잭슨이 재판에서 도박사들에게 돈을 받았음을 인정했다는 설도 있고, 잭슨이 혐의를 인정한 것은 변호사에게 속았기 때문이라며 진술을 번복했다는 설도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설이 있지만, 잭슨이 동정표를 받는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월드 시리즈 타율이 0.375로 팀 내 최고 타율이었다는 점이다.

잭슨이 역대 최고의 타자로 꼽힌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잭슨의 통산 타율 0.356은 메이저리그 역대 3위 기록이다. 또한 잭슨은 베이브 루스가 뽑은 역대 최고의 타자로, 루스는 그의 타격폼을 따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테드 윌리엄스 역시 잭슨의 신화적인 타율을 고려해 잭슨의 복권과 명예의 전당 입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랜디스는 커미셔너 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잭슨의 영구 제명을 유지했고, 이후 커미셔너들도 랜디스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블랙삭스 스캔들 이외에도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도박과 승부조작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조 잭슨에 대한 연민 형성에 기여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선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알아보자.


블랙삭스 스캔들은 최초의 승부조작?

블랙삭스 스캔들은 야구계 최초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야구계에서 승부조작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 1877년에는 루이즈빌 그레이스 구단 소속 4명의 선수가 고의 패배를 했고, 1900년대 초반 선수들 사이에선 다른 구단 경기에 돈을 거는 풍습이 있었다. 1920년 시카고 대배심이 블랙삭스 스캔들 조사에 나서게 된 계기도 1920년 정규 시즌 일부 경기가 조작됐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에 있었다. 블랙삭스 스캔들 이외에도 메이저리그에는 도박과 승부조작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던 것이다.

구단주들 역시 메이저리그에 퍼진 승부조작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1919년 정규 시즌에서 승부조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블랙삭스 스캔들이 발생한 월드 시리즈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화이트삭스 구단주였던 코미스키는 월드 시리즈 1차전 패배 후 승부조작의 분위기를 감지했고, 이를 내셔널리그 및 아메리칸리그 회장과도 의논했다. 그러나 코미스키와 양대 리그 회장은 야구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어떻게든 유야무야 넘어가려 했다.

그렇다면 블랙삭스 스캔들이 최초의 승부조작으로 유독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블랙삭스가 대중들에게 최초로 알려진 승부조작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랜디스의 편향된 일처리도 블랙삭스 스캔들이 부각되는 데 한몫했다. 화이트삭스 선수 8명을 영구 제명한 랜디스는, 다른 승부조작에 대해선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1926년에는 1919년 정규 시즌 당시 타이 콥과 트리스 스피커의 승부조작 의혹이 불거졌는데, 랜디스는 두 선수를 이적시키는 선에서 징계를 마무리했다.


블랙삭스 스캔들과 보류 조항

앞서 언급했듯이, 1900년대 초반 메이저리그에 만연했던 도박과 승부조작의 분위기는 선수들의 권익이 제대로 보장돼 있지 않았던 시대 배경과 직결된다. 그 중심에는 선수들의 연봉 협상 권리를 앗아간 보류 조항이 있었다. 보류 조항의 존재는 돈에 대한 선수들의 집착을 만들어내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보류 조항이 신설된 것은 1870년대였다. 원래는 구단 간 선수 이적이 자유로웠으나, 이는 구단에 재정적 부담을 안겼다. 결국 구단주들은 각 구단마다 5명의 선수를 보류 조항에 묶을 수 있도록 합의했고, 1880년대에는 보류 조항의 적용 범위가 모든 선수로 확대됐다. 선수들은 보류 조항에 묶여 마음대로 이적할 수 없었고, 오직 구단에 의해서만 재계약/트레이드/방출 등이 결정됐다. 이적할 권리가 없으니 제대로 된 연봉 협상의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MLB 초대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물론 선수들은 보류 조항에 반발했다. 선수 겸 변호사였던 존 워드는 선수 권익의 보호를 위해 프로야구선수동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워드는 1890년 플레이어스 리그를 창설해 내셔널리그와 경쟁을 벌였는데(당시에는 아메리칸리그가 생기기 전이었다), 내셔널리그와의 경제력 싸움에서 패하며 1년 만에 폐지됐다. 1915년에는 페더럴 리그가 창설돼 메이저리그(내셔널리그 및 아메리칸리그)를 상대로 선수들에 대한 독점 금지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법원은 메이저리그의 손을 들어줬는데, 당시 판결을 내린 판사가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였다. 1920년 블랙삭스 스캔들 사후 처리 때 랜디스가 초대 커미셔너로 추대됐던 배경에는 1915년의 아첨 섞인 판결이 있었다. 결국 페더럴 리그 역시 폐지됐고, 메이저리그는 미국 프로야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이는 보류 조항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일부 선수들이 보류 조항에 반발해 나름 저항했지만, 그 저항은 조직적이지 못했다. 지금이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가 있지만, 당시에는 선수들의 단체 활동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조지 벡시가 본인의 저서 <야구의 역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 야구는 국가의 가치를 구현하는 국민적인 게임이라는 정서가 있으며, 선수들 역시 이러한 정서 속에서 야구에 노동조합이 활성화되는 현상은 왠지 비애국적이라고 생각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지금과 같은 선수노조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66년 마빈 밀러의 노조위원장 선임 이후부터였다. 밀러는 파업과 같은 선수들의 단체 활동을 주도하며 중재위원회의 설립, FA 제도의 설립 등을 이뤄냈다.


블랙삭스 스캔들, 그 이후

대중들에게 최초로 알려진 승부조작 사건이었던 블랙삭스 스캔들은 야구 팬들에게 많은 실망을 안겼다. 랜디스가 스캔들에 연루된 선수들에게 자비 없는 처벌을 내린 것은 야구 팬들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망한 야구 팬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끌어들인 것은 랜디스의 판결이 아닌, 베이브 루스의 홈런쇼였다.

2005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시카고 화이트삭스

블랙삭스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1919년 월드 시리즈에서의 고의 패배 이후 86년간 우승하지 못했다. 이는 블랙삭스의 저주라고 불리며 밤비노의 저주, 염소의 저주, 와후 추장의 저주와 함께 메이저리그 4대 저주로 꼽혔다. 화이트삭스가 저주를 깬 것은 2005년 월드 시리즈로, 1917년 이후 88년 만의 우승이었다.


야구공작소 당주원 칼럼니스트
에디터 = 야구공작소 김준업, 나상인
사진 출처= MLB.com, chicacotribune.com, Wikipedia,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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