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 인터벌: ‘이기는 법을 아는 투수’는 존재할까?

투수의 인터벌이 짧을수록 야수들이 체력을 아낀다?

야수들을 편하게 해주는 투수는 팀 공격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속설이 있다. 투구와 투구 사이 인터벌이 짧을수록 야수들은 체력을 아낄 수 있고, 따라서 공격 때 더욱 집중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속설은 선발투수의 승운을 본인의 능력으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관점과 관련이 있다(한 스포츠전문지의 2015년 기사는 NC의 전 외국인 투수 에릭 해커가 승운이 없는 이유를 긴 인터벌에서 찾았다). 실력은 비슷할지라도 득점 지원을 유독 많이 받는 투수와 적게 받는 투수가 존재한다. 둘의 차이는 무엇에 기인할까? 수비에서의 흐름이 공격으로 이어지는 게 사실이라면, 야수들의 체력을 아껴주는 투수가 진정 ‘이기는 법을 아는 투수’가 아닐까?


선발투수의 인터벌과 득점 지원의 상관관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의 인터벌(Pace)과 경기당 득점 지원의 상관관계를 살펴보기로 했다. Pace는 팬그래프에서 제공하는 지표로, Pitch F/X 데이터를 이용해 계산한 투수의 인터벌이다. 계산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특정 타석의 마지막 투구가 뿌려진 시각에서 첫 투구가 뿌려진 시각을 뺀다(투수의 견제 행위나 코치의 마운드 방문에 소요된 시간은 제외한다). 이렇게 구한 타석의 총 소요시간을 (투구 개수-1)로 나눠주면 타석의 평균 Pace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타석 Pace를 모두 더한 다음 타석 수로 나눠주면 특정 연도 특정 투수의 인터벌이 얼마나 길었는지를 알 수 있다.

Pace는 투수의 퍼포먼스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짧은 인터벌로 타자들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들었던 마크 벌리와 같은 투수가 있는가 하면, 투구 간 루틴을 길게 가져가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흐트러뜨렸던 조시 베켓과 같은 사례도 존재한다. 둘은 모두 빅리그에서 10년 이상 활약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인터벌은 투수가 타자를 공략하는 스타일일 뿐, 그 투수가 얼마나 좋은 투수인지를 보여주지는 않는 것이다.

경기당 득점 지원은 베이스볼 레퍼런스에서 제공하는 Run Support in Games Started를 참고했다. 이 지표는 어떤 투수가 선발 등판한 경기에서 팀이 (9이닝당) 평균적으로 몇 득점을 올렸는지를 보여준다. 타선이 점수를 내지 못하고 있다가 선발투수가 내려간 뒤에 10득점을 올렸다면, 득점 지원은 0점이 아닌 10점으로 계산된다. 이 10점은 선발투수가 아니라 나중에 등판한 불펜투수에 대한 지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발투수는 경기의 전체적인 페이스를 설정하고, ‘인터벌과 득점 지원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가설이 사실이라면 경기 초반의 체력 소모가 경기 후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Run Support in Games Started를 종속변수로 사용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투수의 평균 Pace와 평균 득점 지원의 상관관계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내셔널리그에서는 투수도 타격을 하므로 선발투수 본인의 타격 실력이 득점 지원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사 대상은 아메리칸리그에서 규정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로 한정시켰다. 또한 한 해의 표본만으로는 어떤 결론이 나와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것이므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의 표본을 조사했다. 그럼 이제 그 결과를 살펴보자.

인터벌이 짧을수록 득점 지원을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위 차트에서 점선으로 표시된 추세선이 가파른 우하향 곡선을 그려야 한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일관적인 경향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연도별로 Pace와 득점 지원의 상관계수는 각각 -0.123(17년)/-0.315(18년)/0.107(19년)이었는데,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해석하기에는 너무 절댓값이 작고 해마다 변동이 크다. 실제로 3년 내내 ‘평균보다 짧은 인터벌&평균보다 많은 득점 지원’을 기록한 투수는 한 명도 없었다(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득점 지원은 투수의 인터벌이 아니라, 팀 타선의 강함과 운으로 결정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다승, 이제는 정말로 놓아줄 때

FIP, DRA, xwOBA 등의 세이버메트릭스 투구 지표가 여럿 등장해서 소위 ‘클래식 스탯’들의 지위를 넘보고 있지만 다승은 여전히 투수의 커리어를 평가할 때 주요한 잣대의 하나로 사용된다. 또한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에서 해마다 가장 발군의 실력을 보인 투수에게 수여하는 사이영상은 수상자 선정에 승수와 승률을 지나치게 많이 반영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2016년만 하더라도 릭 포셀로가 22승 4패의 압도적인 승패 전적을 앞세워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저스틴 벌랜더, 코리 클루버를 제치고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는 선발투수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본인이 던지는 동안 최대한 실점을 억제하여 팀이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선발투수는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실력이 매우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해 한 자릿수 승수에 그치는 투수가 있는가 하면, 번번이 실점을 허용하는데도 타선이 그보다 더 많은 점수를 내줘서 승리를 챙기는 투수도 있다. 지난 3년간 아메리칸리그(위 차트와 같은 표본)에서 득점 지원과 승수의 상관계수는 0.651(17년)/0.701(18년)/ 0.450(19년)에 달했다.

승운은 투수의 실력과 무관한데도 어떻게든 ‘이기는 법을 아는 투수’의 비결을 규명하려는 태도가 인터벌의 미신을 만들어냈다. 수비에서의 흐름이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오래된 통념이고, 투수가 빠르게 공을 던지면 야수들이 체력을 약간이나마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벌 가설’은 꽤나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 선발투수의 인터벌과 득점 지원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 인터벌의 길고 짧음은 어디까지나 투수의 고유한 스타일일 뿐이다.

인터벌이 짧은 투수는 수비 시간을 줄여줘 팀 동료들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사랑이 득점 지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야구공작소 나상인 칼럼니스트

자료 출처=베이스볼 레퍼런스, 팬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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