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을 평가하는 방법, 포지션 엔트로피

‘유틸리티 선수’의 가치

야구 팬이라면 2018 아시안게임 엔트리 선발과정에서 LG트윈스 오지환의 대표팀 승선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기억할 것이다. 대표팀 엔트리 선발은 병역 면제 혜택과 직결되기 때문에 항상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당시 많은 팬들이 오지환이 국가를 대표할 만한 선수인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전 유격수는 김하성으로 결정돼 있는 상태였고, 오지환이 엔트리에 뽑힌다면 백업 내야수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오지환은 2009년 데뷔한 이후 줄곧 유격수로만 뛰었고, 단 한 이닝도 다른 포지션을 소화한 적이 없는 선수였다. 따라서 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이 중요한 대표팀 백업 내야수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오지환의 선발을 반대하는 이들의 주된 논리였다.

야구에는 투수를 제외하고 8개의 포지션이 있다. 각 포지션은 서로 다른 능력을 요구한다. 중견수는 발이 빨라야 하며, 우익수는 어깨가 강해야 한다. 유격수는 내야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대처하는 센스가 좋아야 하고, 1루수는 키가 커야 한다. 포지션별 역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고 신체능력이 탁월한 선수만이 여러 포지션을 능숙하게 소화할 수 있다.

이러한 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은 팀에 큰 도움이 된다. 로스터 운영에 있어서 유연성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전 3루수가 부상을 입어 그 자리를 대체할 선수가 필요한 상황이라 하자. 3루를 소화할 수 있는 다른 선수가 28인 로스터에 없다면, 2군에서 타격이 약한 대체선수를 올려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백업 내야수 중 3루 수비에 능한 선수가 있다면 빠진 주전 3루수의 공격력을 대체할 만한 대타자원을 포지션에 상관없이 콜업해서 쓸 수 있다. 또 다른 예로, 경기 후반 적시타가 필요한 상황에서 주전 유격수 A를 대타 B로 교체했다고 하자. B는 1루 수비만 가능한 선수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유격수 자리에 대수비로 또 다른 선수 C를 투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1루수로 뛰고 있던 D가 유격수 수비도 소화할 수 있다면 D를 유격수 자리로 옮기고 B를 1루에 세우면 된다. 이렇게 되면 C라는 벤치 자원을 아껴 두었다가 또 다른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다.

이처럼 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은 팀 운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지만 어떠한 지표도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전통적인 수비 지표인 수비율부터 OAA(Outs Above Average)와 같은 세이버메트릭스 스탯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표는 각 포지션(혹은 위치)에서의 수비 효율을 측정할 뿐 야수가 얼마나 ‘궂은 일’을 맡아 했는지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지표

그렇다면 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을 어떻게 수치화할 수 있을까? 단순히 소화한 포지션 수로 줄 세우는 것은 해답이 되지 못한다. 똑같이 3개의 포지션을 뛰었다 하더라도 각 포지션에서 총 수비이닝의 33.3%씩 뛴 것과 한 포지션에서 99%를 뛰고 나머지 두 포지션은 한두 번 ‘알바’를 뛴 것은 같은 난이도라고 볼 수 없다(전자가 당연히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화한 포지션 수와 함께 여러 포지션에서 얼마나 ‘골고루’ 수비를 했는지를 모두 반영하는 지표가 필요하다.

그때 필자에게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투수의 구종 다양성을 측정하는 지표인 피치 엔트로피를 야수의 소화 포지션에 적용하는 것이다. 피치 엔트로피는 ‘– p1 × log(p1) p2 × log(p2) – p3 × log(p3) – ··· ’(p1, p2 등은 각 구종의 구사 비율)로 구해지며, 값이 클수록 다양한 구종을 고르게 던지는 투수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지표를 투수의 구종 다양성이 아니라 야수의 수비 이닝 분포에 적용하면(p1, p2는 포지션별 소화 이닝 비율, 소수점 셋째자리에서 반올림), 야수가 얼마나 다양한 포지션을 고르게 소화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포지션 엔트로피’라 이름 붙이기로 하자. 예를 들어 3루수에서 수비 이닝의 100%를 소화한 야수의 포지션 엔트로피는 1 × log 1= 0이다.

포지션 엔트로피가 야수의 순수한 능력을 보여준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포지션은 기본적으로 팀의 필요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똑같은 멀티포지션 소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두 선수 A와 B가 있다고 하자. A의 팀은 모든 포지션에 확실한 주전 선수가 자리잡고 있어 A는 시즌 내내 자신의 주 포지션인 중견수만 맡았다. 반면 B의 팀은 수비진 이곳저곳에 구멍이 많아, B는 본인의 주 포지션인 중견수 외에도 좌익수, 우익수, 1루수 등에 전천후로 기용되었다. 위 예에서 B의 포지션 엔트로피는 A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게 나오겠지만 그것이 온전히 B의 능력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포지션 엔트로피는 본질적으로 타점이나 승리와 같이 팀의 상황에 의존적인 지표인 것이다. 따라서 WAR 등 중립적인 상황에서의 선수의 기여도를 나타내는 지표와는 통합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지션 엔트로피는 WAR이 놓치고 있는 요소를 보여주는 보완적 지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KBO리그 야수들의 포지션 엔트로피 분포를 알아보자.

<2019 KBO 야수 포지션 엔트로피 분포>

위 표는 2019시즌에 필드에서 100이닝 이상을 소화한 KBO 야수 184명의 포지션 엔트로피 분포를 보여준다. 이들의 평균은 0.40, 표준편차는 0.42였다. 수치별로 살펴보면 0을 기록한 선수가 73명으로 가장 많았고(이들 중 대부분은 시즌 내내 한 포지션만을 소화한 선수들이다), 제일 높은 수치를 보인 선수는 1.35를 기록한 두산 신성현이었다. 184명의 선수 중 2018년에도 100이닝 이상 소화한 선수는 132명이었는데, 이들의 2018년 평균은 0.40이었다. 또한 2018년 포지션 엔트로피와 2019년 포지션 엔트로피의 상관계수(year-to-year correlation)는 0.70, 결정계수는 0.49였다. 이는 2018년 포지션 엔트로피 값이 2019년 포지션 엔트로피 값의 49%를 설명해 준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포지션 엔트로피를 읽는 법

포지션 엔트로피는 높을수록 좋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팀과 선수 개인의 차원으로 나누어 살펴봐야 하는데, 일단 팀 차원에서의 답은 ‘아니다’이다. 팀의 포지션 엔트로피가 높다는 것은 다르게 생각하면 포지션별로 확실한 주전 야수가 자리잡지 못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9년 KBO에서 팀 포지션 엔트로피 평균과 팀 수비 WAA(평균 대비 승리기여도)의 상관계수는 -0.57로, 두 수치는 서로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였다. 아래는 지난해 팀별로 100이닝 이상 소화한 야수들의 포지션 엔트로피를 단순 평균한 값이다.

<2019 팀별 포지션 엔트로피>

그렇다면 선수 개인의 차원에서는 어떨까? 선수의 포지션 엔트로피와 수비 WAA(포지션 보정 x)의 상관계수는 -0.04로 나왔다.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이고,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는 선수들이 반드시 여러 포지션에서 수비를 잘하는 선수들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포지션 엔트로피의 가치는 WAA나 WAR이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같은 수비 생산성을 보인다는 전제 하에서 포지션 엔트로피가 높을수록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KT, 기아, SK의 중견수 3명을 비교해 보자.

세 명의 중견수는 모두 2019년에 1000이닝 내외를 소화하며 비슷한 수비 생산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뭇 달랐는데, 먼저 로하스는 수비 이닝 중 69%를 중견수로 뛰었으나 좌익수로도 29%를 뛰었고 우익수와 1루수로도 나선 적이 있었다. 한편 이창진은 수비 이닝 중 95%를 중견수로, 4%를 2루수로, 1%를 3루수로 뛰었다. 그리고 김강민은 947.1이닝 전체를 중견수 포지션에서 소화했다.

2019시즌 세 명 중 가장 뛰어난 수비수는 누구였을까? 세 명 중 가장 높은 WAA(평균 대비 승리기여도)를 기록한 이창진을 꼽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러 포지션을 소화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로하스를 최고의 수비수로 꼽고 싶다. 결론은 여러 선수의 수비 WAA 수치가 비슷할 때, 포지션 엔트로피는 높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포지션 엔트로피의 한계와 수비 지표의 미래

포지션 엔트로피는 여전히 한계가 많은 지표이다. 첫째로, 포지션 엔트로피는 각 포지션의 수비 난이도 차이를 고려하지 못한다. 외야의 세 포지션(좌익수, 중견수, 우익수)은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플레이(뜬공 포구, 펜스플레이, 원거리 송구 등)에 큰 차이가 없다. 따라서 외야수들은 필요에 따라 포지션을 쉽게 옮겨 다니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내야수는 포지션별로 기대되는 역할이 매우 상이하다. 또한 포수는 다른 어떤 포지션과도 구별되는 신체적 능력과 경기에 대한 이해도가 요구된다. 따라서 좌익수와 우익수를 50%씩 소화한 선수와, 2루수와 포수를 50%씩 소화한 선수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둘째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포지션은 팀의 필요에 의해서 정해진다. 선수에게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팀 상황이 그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포지션 엔트로피 값은 0으로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지션 엔트로피는 차후 더 깊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을 반영한 새로운 공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포지션에 따른 가산점 부여/엔트로피를 팀 평균값에 대한 비율로 나타내는 방식 등). 또한 KBO보다 야수의 멀티 포지션 소화능력을 중시하고, ‘슈퍼 유틸리티’ 타입의 선수가 많은 MLB의 포지션 엔트로피가 어떻게 분포하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포지션 엔트로피가 세이버메트릭스 마지막 미지의 영역 중 하나인 ‘수비 능력’을 규명하는 데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야구공작소 나상인 칼럼니스트

에디터= 야구공작소 김지호, 김혜원

기록 출처: 스탯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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