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Wikimedia Commons)
[야구공작소 양철종]
2020년은 시작부터 우울하기만 하다. 연초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3월 20일(한국시간) 기준 코로나19로 인한 글로벌 누적 사망자 수가 1만 명을 돌파했다. 아시아를 지나 이제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만들고 있다.
코로나19는 야구계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아시아의 경우 프로리그가 열리는 대한민국, 일본, 대만 모두 4월 중순 이후로 개막이 연기됐다. 메이저리그(MLB)는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권고에 따라 5월 중순 이후 정규 시즌 개막 예정이다.. 야구팬들은 사상 유례없는 ‘야구 없는 봄’을 보낼지도 모른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고 야구가 다시 시작한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3월 말에 시작해야 했던 리그가 아무리 빨라도 5월에 개막하게 되면서 가을야구가 아니라 어쩌면 겨울야구까지도 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미국 현지에서도 여러 방안을 언급하고 있다. 코로나19 발발 초기에는 미국 프로농구(NBA)처럼 무관중 경기로 진행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NBA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리그가 중단되자 MLB도 다른 방안을 고려해야 했다. 이에 따라 단축시즌 진행 또는 더블헤더를 넣은 162경기 진행안이 등장하고 있다.
사실 MLB에서 리그 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은 경우는 종종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994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시즌 중단 사태다. 선수노조가 경기를 진행하지 않아 1994년 8월 13일 이후 잔여경기와 월드시리즈가 모두 취소됐다. 파업이 종료된 1995시즌도 162경기가 아닌 144경기 체제로 진행됐다.
그리고 1992년, 모든 팀도 아니고 시즌 전체가 바뀌는 일도 아니었지만 특이한 일정 변경 사건이 있었다. LA 다저스 한 팀이 3일 연속 더블헤더, 6일간 4번의 더블헤더를 진행한 것이다.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다저스의 기존 일정은 4/30 – 5/3 이었으나, 취소되면서 더블헤더로 편성됐다. 사유는 ‘Civil unrest’ 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을까?
로스앤젤레스의 봄은 폭발했다
1992년 4월 29일(이하 미국 현지시간), 미국 흑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생겼다. 약 1년 전인 1991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시에서 고속도로를 과속으로 질주하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이 지역 경찰에 체포됐다. 이른바 ‘로드니 킹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폭력적으로 대응한 것이 드러나 진압에 관여한 경찰관 4명이 기소됐다. 그런데 경찰관 4명 중 3명이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이다.
판결 결과를 접한 LA의 흑인들은 그날 오후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른바 ‘1992년 LA 폭동(1992 Los Angeles Riots)’의 시작이었다. 분노한 흑인들의 시위는 점차 폭력성이 더해졌다. 상점 약탈, 백인 차량 테러와 더불어 일부 지역에서는 총격전도 벌어지며 LA는 무법천지가 됐다.
다운타운 서부에 있는 코리아타운이 큰 피해를 보는 등 폭동의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5월 1일 연방군과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이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됐다. 투입된 병력이 경찰과 함께 진압하기 시작하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든 폭동은 5월 4일 LA 시장이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 사실상 마무리됐다.
LA 폭동은 야구에 어떤 영향을 줬나
‘로드니 킹* 사건’ 판결이 나온 4월 29일은 LA 다저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다저스의 에이스였던 선발 오렐 허샤이저의 투구를 보기 위해 3만 6천 명의 관중들이 다저스타디움을 찾았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후 시내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관중들은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 로드니 킹은 공교롭게도 다저스타디움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다저스 구단은 사태가 마무리된 후 1993년 홈 개막전에 킹을 초대했다.
이날 경기는 필라델피아가 대런 달튼의 3타점 활약에 힘입어 다저스를 7대3으로 꺾었다. 그러나 다저스 팬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장내 아나운서는 관중들에게 경기장 남쪽에 있는 다운타운 쪽으로 가지 말라는 안내를 했다. 3만 명이 넘었던 인파는 경기 막판 만 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원정팀 필라델피아 선수들은 샤워도 하지 못하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을 급하게 빠져나갔다. 당시 선수였던 루벤 아마로 주니어(전 필라델피아 단장)는 호텔로 향하던 길을 떠올리며 “다저스타디움에서 빠져나올 때 고속도로 양쪽에서 연기와 불이 피어올랐다. 우리가 전쟁터에 있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
홈팀인 다저스 선수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닝 중간 클럽하우스의 TV를 통해 폭동이 일어난 사실을 알게 된 선수들은 혼란에 빠졌다. 1992년 내셔널리그 신인상 수상자 에릭 캐로스는 “고속도로가 막혀 집(맨해튼비치)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글렌데일**에 있던 팀 동료 브렛 버틀러의 집에서 나흘 동안 있어야 했다.”라고 회상했다.
** 맨해튼비치는 다저스타디움에서 남서쪽으로 22마일, 글렌데일은 북쪽으로 6마일 정도에 위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저리그 경기가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다저스의 다음 상대였던 몬트리올 엑스포스도 경기 진행을 꺼렸다. 결국 다저스는 필라델피아와 남은 1경기, 몬트리올과의 3연전을 연기했다. 몬트리올 2루수였던 딜리아노 드쉴즈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경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야구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 여름, ‘Let’s play two!’
LA 폭동은 마무리됐다. 다저스도 원정 8연전을 마친 후 5월 15일 뉴욕 메츠전부터 다저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진행했다. 잔여 경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됐지만 미뤄진 경기는 언젠가 열어야 했다. 문제는 다저스(내셔널리그 서부지구)와 필라델피아, 몬트리올(이상 내셔널리그 동부지구)이 당시 지구도 달랐고 연고지도 미 대륙을 정반대로 가로질러야 했다는 것이다. 두 팀이 다저스타디움으로 올 때 경기를 하지 않으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다저스는 이 문제를 더블헤더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필라델피아는 7월 2일부터 4연전, 몬트리올은 7월 6일부터 3연전이 다저스타디움에서 예정됐다. 남은 두 팀과의 홈경기가 없었던 다저스는 결국 ‘죽음의 6일’을 보내야 했다. 7월 3일 필라델피아전, 그리고 몬트리올과의 3연전 모두를 더블헤더로 치러야 했다. 6일간 4번의 더블헤더, 3일 연속 더블헤더라는 지옥의 일정이었다.
짧은 기간 많은 경기를 진행하면서 선발이 부족했던 다저스는 구원투수를 선발로 넣거나 마이너리그 유망주를 콜업시켜 투입했다. 한때 박찬호의 라이벌이었던 페드로 아스타시오도 필라델피아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러 9이닝 10탈삼진 완봉승을 기록했다. 다저스 포수 마이크 소시아(전 LA 에인절스 감독)는 필라델피아전 더블헤더 2경기에 모두 선발로 나와 17이닝을 소화하는 투혼을 보이기도 했다.
6일 동안 10경기를 진행하며 다저스는 5승 5패로 선전했다. 하지만 1992시즌 전체로 보면 다저스는 연고지 이전 이후 최악의 성적인 63승 99패(승률 0.389 / NL 서부 최하위)에 그쳤다. 전년도보다 무려 30패나 더 떠안았다. 물론 부진의 이유를 모두 LA 폭동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영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2020년 MLB는 어떤 선택을 할까
1992년 여름도 어느덧 28년 전 이야기가 됐다. 그 사이 선수 파업으로 리그가 중단되기도 했고, 또 한 번의 흑인 폭동이 미국 반대편 볼티모어에서 일어나 무관중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1992년 여름의 더블헤더 6연전에 등판했던 몬트리올 투수 멜 로하스의 두 살배기 아들은 어느덧 30살이 되어 대한민국에서 4번째 시즌을 맞이한다.
그리고 2020년 메이저리그는 1992년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사태를 맞이했다. 과연 메이저리그의 선택은 더블헤더일까, 무관중 경기일까, 리그 축소일까.
참고 : 밥 나이팅게일, 「25 years after L.A. riots, Dodgers, Lakers reflect on violent week」, USA투데이, 2017년 4월 28일
에디터=야구공작소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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