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보시면 저 빠른 속도의 공이 바깥쪽으로 꽉 차게 들어가니까 방망이가 나갈 수밖에 없어요. 또 저런 각도에서 나오는 슬라이더가 워낙 빠르니까 타자들이 대응하기가 정말 힘들죠.” (지난 8월 26일 볼티모어 vs 워싱턴 경기에서, 허구연 해설위원)
야구 경기 중계 화면에서 가장 오랫동안 볼 수 있는 선수는 바로 투수다. 캐스터와 해설자는 투수의 공 하나하나에 포커스를 맞춰가며 중계를 이끌어간다. 투수들은 이런 공 하나하나를 섞어 던지며 27개(혹은 24개)의 아웃카운트를 만들어낸다. 한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투수들은 타자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한다. 대표적인 방법은 좋은 피칭 레파토리를 구성하는 것이다.
피칭 레파토리라는 말은 자주 들어본것 같지만 정확한 뜻을 알지는 못한다. 피칭 레파토리란 투수가 사용할 수 있는 구종의 범위라고 할 수 있다. 2개의 구종을 던지는 투수는 피칭 레파토리가 단순하다고 할 수 있고, 4개 이상의 구종을 던지는 투수는 피칭 레파토리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구종 자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구종(두산백과)’페이지로 대체하고, 여기서는 헷갈리기 쉬운 구종과 구질의 차이를 간단하게 짚어보자. 간혹 구종과 구질을 혼용해서 쓰는 걸 볼 수 있는데, 게임에 빗대어 설명해보면 구종은 단순히 내가 선택 할 수 있는 것(패스트볼,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등)이고, 구질은 그 구종에 경험치를 쌓아서 레벨-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서 “잭 브리튼(29, 볼티모어 오리올스)은 싱커라는 구종을 90% 이상 사용하며, 그 싱커의 엄청난 구질은 그를 메이저리그 최고의 마무리 반열에 올려놓았다.” 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수많은 메이저리그 투수들은 제각각의 피칭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좀 더 많은 구종을 포함한 피칭 레파토리를 가진 투수가 선호되는 편이다. 많은 개수의 구종으로 레파토리를 구성하면 이닝 소화력에 있어 강점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10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의 시즌 성적을 토대로, 피치f/x상 그들의 레파토리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인 두 구종의 빈도율을 구해서 더한 뒤, 10%마다 끊어서 평균 소화 이닝 수를 구해보았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리치 힐(36, LA 다저스)의 경우 커브의 비율이 49.7%, 포심의 비율이 44.8%, 투심 2.1%, 슬라이더 1.2%의 비율을 보였기 때문에 가장 빈도율이 높은 커브와 포심의 합은 95.5%로 90%대의 카테고리에 포함이 되는 형식이다. 이렇게 나온 결과물을 평균 자책점 기준으로 나눈 수치는 다음과 같다.
두 구종을 가장 높은 비율(90%대)로 구사하는, 이른바 투피치 투수들은 평균적으로 모든 구간대에서 가장 적은 이닝을 소화했다. 반면, 4~5개의 구종을 던지는 60%대부터 40%대에 위치한 투수들은 이닝 소화능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경향성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같다. 특히 ERA 3.99이하의 ‘준수한’ 성적을 보여준 투수들의 경우에는 이 경향성이 ‘매우 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구종 하나를 피칭 레파토리에 추가하며 큰 성공을 거둔 선수가 있다. 기본적으로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플러스급으로 평가를 받는 포심 패스트볼과 평균 이상의 커브를 던지는 좌완 투수였다. 하지만 그의 볼품없는 체인지업은 언제나 그의 평가를 엇갈리게 만들었다. 훌륭한 써드 피치가 없었던 이 선수의 데뷔 시즌 성적은 지금에 비해 그리 좋지 못했다. 21경기에 선발로 나섰고, 평균 5이닝 밖에 소화하지 못했으며 4.26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을 뿐이다. 가장 큰 패착은 단조로운 피칭 레파토리였다. 포심과 커브를 90%가 훌쩍 넘는 비율로 구사하는 단순한 레파토리로는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이듬해, 그가 급하게나마 익힌 슬라이더는 예상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체인지업을 대신한 슬라이더라는 써드 피치는 이 선수가 리그 최고의 에이스 반열에 오르는 데 밑거름이 돼주었다. 슬라이더를 장착한 첫 시즌, 그는 30경기에 선발 등판했고, 평균 5.6 이닝을 소화 했으며 2.79라는 훌륭한 평균 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슬라이더를 점점 더 좋은 구질로 갈고 닦았고, 지난 몇 년간 평균 7이닝을 무리없이 소화하는 무결점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이 선수의 이름은 클레이튼 커쇼(28), LA 다저스의 에이스이며 현 MLB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다.
커쇼가 서드피치로 슬라이더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커쇼는 체인지업을 던지는걸 힘들어 했다. 선수들마다 내재화하는데 애를 먹는 구종이 있고, 커쇼의 경우에는 그게 체인지업이었다. 그럼 왜 하필 슬라이더였을까? 피칭 레파토리를 다양하게 하기 위해서 구종을 추가 할 때는, 현재 던지는 구종과의 시너지 효과를 생각해야 한다. 커쇼의 포심, 커브와 가장 시너지 효과가 큰 구종이 슬라이더였기 때문이다.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선수들은 지금 던지는 구종들과는 다른 구속의 구종을 추가한다. 강력한 패스트볼을 앞세우는 셔저(32, 워싱턴 내셔널스)의 경우 체인지업과 슬라이더의 구속이 비슷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던진 느린 구속의 커브는 그의 커리어에 한줄기 빛이 돼주었다. 커쇼는 반대로 가장 자주 사용하는 패스트볼과 커브 사이에 큰 구속차가 존재했고, 그 간극에 슬라이더를 채워넣어 두 구종 간의 적절한 연결고리를 마련했다.
구속이 비슷하더라도 무브먼트가 다른 구종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다. 자니 쿠에토(30,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포심은 심심한 느낌이 있었는데 포심보다 변화가 심한 투심 패스트볼과 투심과는 반대로 휘어져 들어가는 컷 패스트볼을 섞어 던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노아 신더가드(24, 뉴욕 메츠) 역시 자신의 주 구종인 싱커와 반대 방향의 변화를 가진 고속 슬라이더를 장착해 이번 시즌 훌륭한 성적을 기록했다. 커쇼의 슬라이더는 구속의 차이를 채워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패스트볼과 커브가 갖지 못한 무브먼트를 보여줌으로써 시너지를 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시너지 효과를 잘 이용한 커쇼는 단 세가지 구종으로 레파토리를 구성할 뿐 최근 유행하는 체인지업이나 스플리터 등의 ‘신종’ 변화구 없이도 누구보다 견실한 ‘이닝 이터’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커쇼는 또 다른 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올 시즌 초반 오프스피드 피치용으로 사용하던 슬라이더의 구속이 꽤 오르면서 시너지 효과가 반감됐는데 이를 다시 키우기 위해 더 빠른, 변칙 패스트볼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커쇼의 변칙 패스트볼은 릴리즈 포인트가 다른 패스트볼에 비해 낮지만, 최고 96.5 mph의 구속으로 슬라이더에 비해 8mph 가량 빠르다. 슬라이더를 오프 스피드 피치로 쓸 수 있을 만큼의 구속차를 보인다. 쌓인 기록이 아직까지 많지는 않지만, 새로운 구종의 효과는 상당히 좋다. 그의 슬라이더는 변칙 패스트볼을 사용하기 이전(7.1%의 피안타율)보다 절반 가량의 피안타율(3.6%)을 기록했고, 20.8%의 헛스윙률은 27.1%로 뛰어올랐다. 더 이상 성장 할 데가 없어 보이던 커쇼는 이런 변화를 꾸준히 추구하고 있다.
커쇼가 사상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분명 피칭 레파토리의 핵심인 다양한 구종과 시너지 효과를 가장 잘 이해한 슬라이더의 추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쇼가 우리에게 주는 더 큰 울림은 피칭 레파토리에 대한 높은 이해도 같은 것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을 꾀하는 삶의 자세에서 비롯한다. ‘부모님 재력도 실력’같은 헛소리 속에서도 우리가 정신줄을 놓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어쩌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완벽한 준비를 하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커쇼 같은 이들이 있어서 아닐까.
“나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 오늘 풀어지면 내일은 두 배로 땀을 흘려야 ‘어제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최고를 넘어 MLB최고의 자리로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는 오승환의 한마디가 오늘따라 더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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