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야구공작소 박주현)
[야구공작소 박기태] “그 투수는 어떤 선수인가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계산하기도 벅찰 정도로 복잡한 야구 통계지표가 쓰이는 세상이지만, 투수의 특성을 묘사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여전히 던지는 손의 방향, 구속, 그리고 구종 등이다. 이 중에서 구종은 외모에서 사람의 피부색이 차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비중을 갖고있다. 사람들은 선동열하면 슬라이더, 최동원하면 커브, 류현진하면 체인지업을 떠올린다.
그런데 구종을 정의하고 나누는 기준은 사실 명확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구전처럼 전해져온 이름과 정의만이 있을 뿐, 한 가지 통일된 잣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기준 하나는 공을 쥐고 던지는 방식인 그립(Grip)에 따른 것이다. 실밥 4개에 손가락을 걸친다고 하여 이름이 붙은 포심 패스트볼(Four-seam Fastball)이 대표적이다. 또다른 기준은 공의 움직임, 궤적에 따른 것이다. 패스트볼과 비슷하지만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살짝 떨어지는 싱커(Sinker)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립에 따른 방식과 궤적에 따른 방식은 상호 배타적인 명명방식이 아니다. 지금까지도 두 가지 방식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투수가 던진 공의 종류를 분류할 때 문제가 생긴다. 대표적인 것으로 투심 패스트볼(Two-seam Fastball)과 싱커의 사례가 있다. 오버핸드와 스리쿼터 투수가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포심 패스트볼과 비슷하게 비행하다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떨어지는 궤적을 그린다. 이는 싱커의 정의에 그대로 부합한다. 하지만 어떤 투수가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은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던지는 팔 방향으로, 횡으로 더 크게 휘어진다. 즉, 투심과 싱커는 교집합을 갖지만 100% 일치하는 군이 아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까지는 구종을 분류할 때 투심, 싱커 두 가지 이름이 모두 쓰이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통상적인 대화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데이터 분석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의 공에 이름이 두 개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에 투수가 던진 공은 100개만 있는데, 투심 100개와 싱커 100개가 있다고 결과가 나오는 식이다.
그럼 ‘떨어지는 공’만 싱커라고 하고 옆으로 휘는 공을 ‘투심’이라고 하면 해결될 일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투심 패스트볼이라는 이름에 어폐가 생길 수 있다. 투심 그립을 잡고 던졌는데 싱커로 분류되는 경우는 오류가 아닌가? 혹은, 실밥을 하나만 잡고 던졌다거나(원심) 아예 잡지 않고 던졌는데 옆으로 휘었다고 해서 ‘투심’으로 분류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는 다른 구종들 사이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불펜 투수 앤드류 밀러는 커브 그립을 잡고 커브를 던진다는 느낌으로 변화구를 던진다. 그런데 밀러 본인은 이 공을 ‘슬라이더’라고 생각하면서 던진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공은 팬그래프, 베이스볼 서번트, 브룩스 베이스볼 등 각종 기록 사이트에서 슬라이더로 분류되고 있다. 그립에 따라 구종을 분류했다면 커브가 됐어야 한다.
이런 문제 때문에 투구 추적 데이터를 사용해 구종을 나눌 때는 그립에 따른 분류 방법이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옆으로 휘는 공’, ‘아래로 떨어지는 공’,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공’ 같은 식으로 궤적에 따라 공을 구분하는 게 데이터 분석에선 좀더 효율적인 방식이 된다.
톰 탱고의 피치 팔레트(Pitch Palette)
며칠 전 세이버메트릭스계의 저명인사 톰 탱고가 본인의 블로그에 새로운 분류 방식을 제안했다. 그의 방식도 공의 궤적(무브먼트)에 따라서 공을 나누고 있다. 여기에 추가로 구속을 기준에 더해, 총 2개 기준(무브먼트와 구속)으로 공을 나누는 방법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름을 붙이고 명확한 기준을 세운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으로 고려해 봄 직하다. 앞서 예시로 든 것처럼 같은 공을 사람마다 투심, 싱커라고 불러 생기는 의사 소통의 실타래를 푸는데 도움이 될만하다.
탱고의 분류법은 본인이 블로그에 올린 그림(아래)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궤적에 따라 나눠놓은 모양이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팔레트(Palette)와 닮았기 때문인지 그는 이 분류법에 ‘피치 팔레트(Pitch Palette)’라는 이름을 붙였다.
구속의 경우 시속 5마일 단위로 구분된다. 공의 무브먼트 혹은 궤적은 한가운데의 스피너(Spinner)를 기준으로 8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스피너는 미식축구공을 던질 때처럼 회전이 걸린 공을 뜻한다. 이를 자이로 회전(Gyro Spin)이라고 한다. 자이로 회전이 걸린 공은 비행 도중 중력의 영향만 받으며, 공기저항에 의해 상하좌우로 힘을 받지 않는다.
주의할 점은 그림에 나온것이 오른손 투수가 던진 공의 분류법이라는 것이다. 왼손 투수의 경우 좌우가 반대가 된다. 궤적에 따라 구분한 9가지 명칭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스피너(Spinner) : 자이로(Gyro) 회전이 걸린 공. 슬라이더 다수.
라이더(Rider) : 흔히 말하는 라이징 패스트볼. 대부분의 포심 패스트볼.
테일러(Tailer) : 라이더보다 던지는 팔(arm side) 방향으로 더 휘는 공. 투심으로 분류되는 공의 절반.
러너(Runner) : 테일러보다 아래로 좀 더 가라앉는 공. 투심의 1/3, 체인지업의 2/3 가량.
스크루(Screw) : 낙폭이 큰 공. 커브의 절반.
해머(Hammer) : 대부분의 커브가 여기 해당한다. 일부 슬라이더도 있다.
스위퍼(Sweeper) : 슬라이더, 그리고 옆으로 휘는 커브가 많다.
세일러(Sailer) : 대부분의 슬라이더, 그리고 일부 커터.
모워(Mower) : 커터와 슬라이더가 많다.일부 포심도 해당한다.
궤적 분류법의 설명에 나온 것처럼 기존 방식으로 명명된 구종의 다수가 다양한 그룹으로 나뉘게 된다. 예를 들어 슬라이더는 80%가 세일러로 구분되지만, 모워, 스위퍼, 해머 그룹에도 여럿 걸쳐있다.
제이콥 디그롬과 크리스 세일은 모두 ‘슬라이더’를 던진다. 하지만 디그롬의 ‘슬라이더’는 평균 시속 92.5마일로 날아가는 ‘하드(Hard)’한 공이며, 궤적상 짧게 꺾이는 ‘세일러’나 ‘모워’에 속한다. 반면 세일의 슬라이더는 평균 시속 79마일로 날아가는 ‘소프트(Soft)’ 또는 ‘슬로우(Slow)’한 공이고, 궤적으로는 ‘스위퍼’에 속한다. 기존 방식으로는 두 선수 모두 똑같은 ‘슬라이더’를 던진다는 짧은 설명으로 오해를 부르기 쉽지만(물론 추가적인 설명이 뒤에 덧붙겠지만), 탱고의 방식으로는 더욱 뚜렷한 묘사가 가능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탱고의 ‘피치 팔레트’가 기존의 구종명(Pitch Type)에 대한 완벽한 대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헛스윙을 유도해야 하는 상황에 투수에게 ‘스위퍼를 던져라’고 하는 것보다는 ‘슬라이더를 던지라’고 하는 쪽이 아직까지는 의미가 잘 통할테니 말이다. 탱고 본인 역시 ‘피치 팔레트’가 기존 명명법의 대체재가 아니며 보완재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게 다 괴짜 투수 때문이다
탱고가 다소 뜬금없는 시점에 이런 분류법을 내놓은 건 한 투수 때문이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에서 선발로 뛴 조이 루케시가 그 주인공이다.
루케시는 싱커와 커터, 그리고 독특한 변화구 하나를 던진다. 루케시가 붙인 그 변화구의 이름은 ‘처브(CHURVE)’다. 체인지업(CHangeup)과 커브(cURVE)의 합성어인데, 서클 체인지업 그립을 잡고 던지지만 커브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체인지업은 패스트볼처럼 백스핀이 걸린채 날아간다. 커브는 반대로 톱스핀이 걸린다. 그런데 루케시의 ‘처브’는 마치 슬라이더처럼 자이로스핀이 걸린 채로 날아간다. 마치 미식축구공의 회전처럼 말이다. 본인이 붙인 이름도 기존 명명법에서 벗어나는데 심지어 회전이나 궤적도 일반적인 체인지업/커브와 다르니, 별종 중의 별종인 구종인 셈이다.
체인지업도 아니고, 커브도 아니고, 그렇다고 슬라이더도 아닌 이 공을 두고 탱고는 어떤 한가지 이름을 붙이는 대신에 아예 새로운 분류법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탄생한 ‘피치 팔레트’ 속에서 루케시의 ‘처브’는 50% 스피너, 50% 해머/스위퍼에 속하는 독특한 공으로 명명됐다.
별난 투수 때문에 시작된 아이디어이지만 사실 특별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존 방식에 비해 얼마나 쓸모가 있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나온 해프닝을 한국에서 알 필요가 있냐는 극단적인 의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피치 팔레트가 이 업계를 바꿀 어마어마한 혁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제는 우리가 필요해서 야구를 좋아하고 필요해서 구종 이름으로 친구들과 토론을 했던가. 언젠가 한국에도 루케시 같은 별난 공을 던지는 투수가 나와서 이런 별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별난 글을 별나게 소개해 보았다.
Reference
Tom Tango 블로그
에디터 = 야구공작소 송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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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