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적이자 오늘의 동지, 브라이스 하퍼 필리스에 입성하다

<어제의 적, 동지가 되다. 사진 = flickr_keith allison>

[야구공작소 송동욱] 드디어 그가 왔다. 스프링캠프가 시작할 때까지 계약 소식은커녕 소문만 무성했던 매니 마차도가 계약한 지 열흘 만이었다. FA시장에 남은 유일한 슈퍼스타 브라이스 하퍼가 13년간 총액 3억 3천만 달러란 엄청난 금액에 도장을 찍었다.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13년 3억 2천5백만 달러를 넘어서는 역대 최대 규모의 계약이다. 하퍼가 받게 될 연봉은 다음과 같다. 계약 첫해인 2019시즌에 수령하는 금액은 3천만 달러지만 실제 연봉은 천만 달러다. 이후 2020~2028년까지 연간 2천6백만 달러, 2029년부터 2032년까지는 연간 2천2백만 달러를 받는다. 

<지안카를로 스탠튼의 계약 상세 내용>
<브라이스 하퍼의 계약 상세 내용>

스탠튼과 하퍼의 계약은 총액 규모에선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계약의 내용은 판이하다. 10년 동안 연 3천만 달러를 받는 마차도에 비해 연평균 액수는 적지만 계약 기간과 총액을 보장받았다. 모든 구단에 대한 트레이드 거부권도 챙겼다. 구단도 선수도 오래 끌었던 것에 비해 나쁘지 않은 계약이란 평이다.

물론 올 시즌 FA 시장에 유례없는 한파가 온 것도 사실이다. 이 때문인지 FA를 앞둔 많은 선수가 소속팀과 연장계약을 맺었다. 애런 힉스가 소속팀 뉴욕 양키스와 7년 7000만 달러, 놀란 아레나도가 콜로라도 로키스와 8년 2억 6천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다. 얼어붙은 시장에서 평가받느니 합리적인 선에서 원소속팀에 잔류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겨진 두 명의 거물급 FA 중 마차도가 먼저 계약 소식을 발표했다. 그러자 남은 팀 중 하퍼와 계약할 만한 후보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만족할 만한 계약 기간과 보장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 팀은 필라델피아 필리스밖에 남지 않았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LA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경쟁에 가세했지만, 언론은 필라델피아행을 기정사실로 했다. 그리고 예상은 현실이 됐다.

그렇다면 필라델피아는 여론에 떠밀려 하퍼를 패닉 바이(panic buy)*한 걸까?

*패닉 바이: 전쟁, 재난, 무정부 상태 등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거나 그럴 우려가 있을 때, 생필품 등의 물자를 필요 이상으로 구매하는 행위.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라는 쪽에 가깝다. 2018시즌 필라델피아 타선엔 특징이 없었다. 팀 wRC+는 91로 리그 21위, 평균 이하였다. 타선이 적립한 WAR은 더욱 처참했다. 12.4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전체 23위에 그쳤다. 우승을 노리는 팀의 타선이라기엔 아쉽다.

당연히 필라델피아는 비시즌 동안 타선의 보강을 착실히 진행했다. FA로 앤드류 맥커친을 영입했고 트레이드로 진 세구라와 J.T.리얼무토를 데려왔다. 경험과 실력을 모두 갖춘 타자가 가세했다. 하지만 전력 보강이 우타자 쪽에 치우쳐 있는 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좌타자의 수가 부족한 건 아니다. 지난해 주전 타자 8명 중 좌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중견수 오두벨 에레라, 우익수 닉 윌리엄스, 스위치 히터인 2루수 세자르 에르난데스다. 8명 중 3명이니 타선의 불균형을 논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하지만 지난해 필라델피아의 좌타자들이 기록한 wRC+(93,ML22위)와 OPS(0.709,ML21위)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빈약했던 우타자 풀은 보강을 통해 기대할 만한 타선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좌타자 라인업엔 변화가 없었다.

기대주가 없는 건 아니다. 스프링캠프에서 7타석 만에 2개의 홈런을 때려낸 딜런 커즌스, 지난 시즌 가능성을 보여준 로만 퀸도 있다. 하지만 둘 다 확실한 믿음은 주지 못하고 있다. 타선에 무게감을 실어줄 수 있는 왼손 강타자가 간절히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퍼는 필라델피아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이었다.

데뷔 시즌이었던 2012년부터 줄곧 하퍼는 wRC+ 140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동안 3000타석 이상을 소화한 메이저리그 타자 중 7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우익수라는 포지션, 부족한 수비력이 적용된 WAR마저 30.7로 12위다. 동일 기간 동안 하퍼보다 더 높은 wRC+와 WAR을 기록한 좌타자는 조이 보토 한 명뿐이다. 사실상 최근 6년간 리그 최고의 좌타자였다.

주포지션을 우익수로 변경한 2015시즌부터 기복을 보이던 수비력이 지난 시즌 바닥을 찍은 점은 다소 불안할 수 있다(2015시즌 DRS+6, 2016시즌 -3, 2017시즌 +4, 2018시즌 -16). 하지만 통산 DRS+11을 기록할 정도로 훌륭한 중견수 수비를 자랑하는 오두벨 에레라가 있다. 코너 외야수를 맡는 앤드류 맥커친의 수비도 지난 시즌 DRS+2로 평균 이상이다. 구단도 수비력보단 공격력을 기대하고 있다. 수비로 떨어진 공헌도를 공격으로 만회하는 게 구단이 그에게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3억 3천만 달러라는 총액은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실제 연평균 액수는 그리 크지 않다. 위에서 언급했듯 첫해를 제외하면 하퍼의 연봉은 매년 2천 2백만 달러에서 2천 6백만 달러다. 적진 않지만 필라델피아 정도의 빅마켓 구단이 감당하지 못할 금액도 아니다.

티켓 파워도 쏠쏠하다. 하퍼의 계약 소식이 발표된 후 하루 만에 약 10만 장 이상의 티켓이 판매됐다. 이는 구단 신기록이라고 한다. 이에 힘입어 필라델피아의 티켓 누적 판매량은 지난해 이맘때보다 20만 장 이상 늘어났다. 16세의 나이로 SI(sports illustrated) 표지 모델에 발탁된 하퍼의 타고난 스타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시작은 달랐지만, 함께 뛰게 된 맥커친-오두벨-하퍼. 내년에는 트라웃이 올까?

사진= flickr_keith allison>

하퍼가 팀에 도움이 될 선수라는 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초장기 계약이 향후 팀에 걸림돌로 작용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불과 5년 계약을 맺은 라이언 하워드로 인해 호된 추락을 경험한 필라델피아의 팬이라면 충분히 가질 만한 합리적 의심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계약은 조금 다르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완성된 팀이었다. 전력을 유지하며 계속 우승을 노려야 했다. 팀의 간판타자인 하워드에게 큰 규모의 연장계약을 선사한 것은 무리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계약이 재앙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2010년 NLDS에서의 아킬레스건 부상이다. 이후 하워드가 완전히 하향세를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하퍼는 드래프트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스타성, 실력,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야구장 바깥에서도 팀에 큰 도움이 된다. 커리어 동안 잔부상이 몇 번 있었지만 장기부상은 없었다. 만 27세란 젊은 나이에 시작되는 계약이란 점도 긍정적이다. 갑자기 기량이 떨어질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필라델피아 의 향후 3년간 팀 연봉총액 유동성>

하퍼의 계약이 팀 페이롤의 유동성을 감소시킨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결론은 ‘아니다’에 가깝다. 필라델피아의 팀 연봉총액엔 아직 여유가 있다. 메이저리그 기준으로 보장 금액과 옵션까지 전부 포함해도 1억 3240만 달러다. 올해부터 3000만 달러를 받는 하퍼를 더하면 약 1억 6240만 달러가 된다. 사치세 계산을 위한 기타비용을 전부 합해도 약 1억 8900만 달러니 사치세 기준에 1660만 달러가량이 남는다.

내년 시즌 후 FA가 되는 마이크 트라웃의 영입전에 뛰어들 수 있을 정도다. 하퍼의 장기계약이 팀의 페이롤 관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증거다. 페이롤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맺은 하워드의 계약과는 다르다.

물론 구단 운영엔 항상 변수가 따른다. 이미 필라델피아는 최악의 상황을 맛본 적이 있다. 2008년 우승 이후 그 달콤함에 취해 뒤를 생각지 않은 올인 전략의 후폭풍은 팀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이제는 프런트도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섣불리 장기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황에서 하퍼와의 계약은 의외였지만, 이해할 만했다. 절대 계획 없이 큰돈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계약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필라델피아는 한때 마이크 트라웃과 함께 메이저리그를 양분할 것이라는 평가를 들었던 브라이스 하퍼를 품는 데 성공했다. 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선수의 체면도 세운 윈윈 계약이었다. 하퍼라는 확실한 주전선수를 얻었으니 자리가 애매해진 선수를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다. 패닉 바이라기보단 스마트 컨슈머와 같은 계약이었다.

브라이스 하퍼가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 우승의 종소리를 가져다줄 바로 그 선수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는 평생의 직장을 원했고, 그를 제공한 필라델피아와 운명공동체가 됐다는 점이다. 대권을 향해 달려야 할 팀과 욕심이 많은 슈퍼스타. 이 조합만으로도 우승의 종소리가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에디터 = 야구공작소 조예은

기록출처: fangraph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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